건설 역정을 시로 물 드린 윤해균의 회상 기록을 매일 혹은 주간으로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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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은 물에 젖지 않는다
PROLOGUE
-건설을 시로 물들인 자서전적인 이야기-
아침에 일어나 서둘러 해야 할 일도 출근도 하지 않는 시간이 나에게도 찾아왔다.
그동안 힘차게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면 보람도 많이 느껴 이제는 편히 쉬면서
그간 잊고 지냈던 새로운 일을 찾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들지 않았다.
우선 소홀했던 내 몸에 투자하여 운동을 하여 생긴 에너지로 책을 읽고 나의 이야기를
쓰기로 하니 조금씩 바빠지기 시작한 새로운 나날의 요즘이다.
짧지 않았던 그간의 인생사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들어서야 예측불허의 험난했던
내 역사에도 크고 작은 행복과 숱한 후회가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소년시절 보리 고개를 무사히 지나 20세부터 국내외 건설 현장을 오가며 마음껏 열정을
태우고 끝내는 많은 직원을 거느린 플랜트 건설그룹 오너 회장을 거쳐 대학교 강단에
서기까지의 남다른 장편 시나리오를 시와 함께 집필을 시작합니다.
무수히 많은 경험과 잊지 못할 사연들을 모아 정리하다 보니 그나마 매순간 운이 좋아
기회는 살리고 위험한 순간은 슬기롭게 피하고 이겨내어 지금껏 잘 살아왔고 드디어
이글을 쓰는 기회가 주어진 지금이야 말로 내겐 커다란 행운입니다.
더 이상 기억력이 나빠지기 전에 추억을 더듬고 소중한 자료와 사진을 찾고 타이프를
배우며 글을 쓰는 이시간이 너무 행복 합니다.
어릴 적부터 써왔던 일기와 10년 전인 2008년 문학세계 신인상으로 시인 등단 한 것이
글쓰기에 도움이 되지만 그럼에도 최근 일 년여 책도 많이 읽고 (글쓰기 공부 책이 많은지
처음 알았음) 신인 작가의 마음을 갖고 차분히 펼쳐 보여 드리겠습니다.
나를 위한 글이기도 하지만 항상 긍정의 마인드로 매 순간을 이겨나간 모습과 과정을
꾸밈없이 써서 누군가 읽고서 간접으로 경험하여 앞으로의 삶에 조금이나마 위안과 도움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진실로 최선을 다하고 좀 더 겸손하게 써나가겠습니다.
아울러 미흡한 제 글과 시를 읽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하염없는 애정과 그리고
많은 성원 부탁 올립니다.
짙어가는 가을에 / 윤 해 균
“지나간 고난을 잊어버리는 것은 그 고난을 야기했던 힘들을 무찌르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마련이다” -조지산타야-
“ 우리의 삶보다 더 위대한 이야기는 없다.” -니체-
저자 소개서
전쟁 기념관에 항상 걸려 있는 사진이 있다.
폐허 속에 엄마 주검을 부여안고 우는 아기
그 아이는 하늘나라로 가신 어머니 가호와 사랑으로
운 좋게 지혜로운 청년으로 잘 자라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초기인 70년대 부터
플랜트 건설 엔지니어링 초창기 멤버로 뛰어들어
지금껏 힘차게 살아 안정도 얻고 성공까지 하여 퇴임 후,
지금은 등단 시인으로, 국토부 전임교수로 대학 강의도하고
글을 쓰며 행복하게 지내는 이시대의 경로우대인
그러나 육체와 정신은 아직 한창이라 우기며
열정을 고이 간직한 건설 시인 -웅천 윤 해 균-
꽃잎은 물에 젖지 않는다
- 건설역정을 시로 물 드린 자서전 -
목 차 ( LEGEND )
1. CEO 단상과 회상
2. 잊고 싶고 알 수도 없는 어린 시절
1) 백일잔치의 비극
2) 잊어버린 소년의 꿈
3. 1970년 시작한 첫 사회생활
1) 첫 걸음을 마포에서 시작하다
2) 초창기 플랜트 건설 엔지니어링 입사기
3) 처음 타보는 비행기 안에서
4) 두 번째 가는 중동 현장이야기
4. 내게도 행복한 시간이 오다
1) 행복한 웨딩마취를 올리다
2) 세 번째 중동 이야기
3) 건설이 그림을 그리다
4) 아 - 동아건설 그리고 창업
5. 바닥에서 시작한 10년 열정과 성공
1) 도원 엔지니어링 , 도원 디테크 건설 창업
2) 도원의 태동과 흐름
3) 감성 건설 경영에 시를 입히다
4) 회장의 하루 일과와 건설현장 일기
5) 기업인 대표로 평양 방문기
6) CEO 반성문
7) 지루한 법정다툼의 결말
6. 다시 시작한 제3의 길
1) 두 번의 건설 위탁 경영과 성과
2) 마지막 창업- 불꽃을 태우다
3) 대학에서의 플랜트 EPC 건설 강의
7. 정시에 찾아온 따사로운 시간
1) 맞춤 운동의 생활화
2) 손주 바보가 된 할아버지
3) 기회는 세 번이다
4) 행복하기보다는 가치 있는 삶
5) 쓰면서 화해하고 치유하니 행복하다
6) 작가의 길로 들어서다
8. 시와 수필 Scrap
1) 왕년 정산 후, 다시 꿈꾸는 슈퍼 애벌레 외
글을 마치며 에필로그
첨부 : 윤 해 균 걸어온 길 (연보)
1. CEO 단상
장마가 시작될 즈음인 1998년 7월 13일 마구 내리는 빗속으로 용달차 3대가 말죽거리로 들어오고 있었다.
도곡동 사무실로 얼마 전 파산한 동아의 기술 자료와 가구 등을 옮기면서
그날은 참으로 깊은 계곡에 힘든 사람들과 같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20여명의 동료들이 빗속에 짐을 옮기는데 누군가 비 오는 날 이사하면 잘산다는 덕담의
작은 기대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보이는 것이 없는 출발이었다.
옛 직장 동료 10여 명이 모여 도원기업의 상호로 출발한지 어언 8년, 당시 IMF로 퇴출된 동아엔지니어링의 서글픈 종말을 딛고 다시 엔지니어링의 작은 불씨를 살리려고 애쓰던 초창기 모습이 이렇듯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IMF의 혹독한 경제 환경에서, 기댈 곳이라고는 아무데도 없는 무지공처의 환경에서
그나마 20평도 안되는 사무실 운영비라도 건지려고
유아복 재고품을 전주에서 싣고와 아파트 단지에서 골라골라 땡처리 하던 일,
한 개 들기도 무거운 가정용 두부기계 샘플을 두개씩이나 양손에 들고 연신내에서 양재동까지 지하철로 운반하던 일,
추운 겨울 분당 이마트 앞에서 시들지 않는 장미를 팔던 여직원의 모습,
단돈 20만원짜리 의료기기 매뉴얼 번역 용역을 받으려고 동대문 골목 의료기기상을 찾아 헤매던 일,
지역 난방기술에 건축기사 1명의 인력을 파견하기 위해 7번이나 방문했던 기억 등 사업초기에 돈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고 보자는 헝그리 정신으로 굳게 뭉쳐 서로 격려하며 일에 몰두하던 모습을 새삼 떠올리자니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니 저려온다.
그러한 초심으로 뭉쳐 SK건설과 삼성엔지니어링으로 이어지는 하도설계업무를 실행을 따지지 않고 철야를 해가며 몸으로 때워 노력한 것이
오늘의 도원을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제 200여명으로 늘어난 우리 도원가족과 상반기 수주 1000억 돌파를 바라보면서 그간 임직원들의 노고와 열정에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고마움과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이제 돌이켜보면 지나온 시간은 우리에게 많은 좌절과 고통을 안겨 주었지만
그 반면에 우리에겐 희망과 행운이 항상 함께 했고
그 덕분에 우리는 지금처럼 강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도원가족이 자칫 회사 급성장에 따른 매너리즘과 분파의식으로 자신도 모르게 원치 않은 방향으로 젖어 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동시에 떠오른다.
어떻게 하면 우리 도원가족 모두를 도원 창업 초기의 초심으로 돌아가 제 2의 도약을 향한 대장정에 한마음으로 동참하게 할 수 있을까.?
새로 합류하는 동지들이 도원 창립 초심으로 같이 성장하는 좋은 방안이 없을까? 하고 지금도 긴장을 놓지 않고 매사 조심하고 마음을 굳혀본다.
사업 초기의 어렵고 힘든 시기 홀로 올라가 생각에 잠기던 싸리고개며, 그 옛날 출퇴근 때 일부러 돌아가던 양재성당의 성모마리아상 앞은 요즘도 자주가고 들르며 그때의 상념을 떠올리면서 항상 외치는 마음은 초심이다.
회사 CEO로서 도원가족 한사람 한사람을 사랑하듯이 모든 도원인 각자가 한마음으로 서로 믿고 회사를 사랑해 주기를 염원하며 기도한다.
분명코 우리 도원은 더욱 성장 발전하여 일류 회사로 발돋움할 것이며,
우리의 목표이자 slogan인 ‘100년 명품기업’을 이룩하여,
한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보다 활발한 사회활동 기여를 실현하면서
최고 수준의 연봉과 사원복지로 도원가족 모두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꿈꾸면서 회사 CEO로서 한층 더 분발할 것과 도원인 모두가 각 분야 최고를 향한 선의의 경쟁을 함에 튼실한 후원자이자 공정한 관리자로서의 CEO가 될 것을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스스로 다짐해본다.
“주어진 조건이 아무리 최악일지라도 위기는 곧 기회이며 열심히 할 구실을 제공한다”
2006년 7월 13일 도원건설 그룹 CEO 윤 해 균
2006년 도곡동 본사앞에서 도원건설 직원과
2005년 도원건설 BI "SIUS" 발표기념 한마음 체육대회 모습
2. 잊고 싶고 알 수도 없는 어린 시절
2-1 백일 잔치에 일어난 비극
전쟁 기념관에 가면 꼭 걸려있는 낮 익은 사진이 있다.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 속에
어머니 주검 옆에서 울고 있는 아기 사진,
젖먹이 그 아이는 죽은 엄마 가슴을 파고들며 울고 있지만
거의 대부분 아기는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그중 한 아기가 바로 나인 것이다.
비록 죽은 어미의 몸은 더 이상 아기를 돌볼 수도 먹일 수도 없지만 이승과 저승을 초월한
모정의 사랑이 아기를 살려내는 사후 기적을 만든다고 믿는다.
전쟁의 막바지로 휴전선에서 밀고 밀리는 교전 속에 서울 종로구 평창
에서 태어난 그해 100일째 되던 날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에 잔치 상 마련하고 떡도 만들고
손님맞이 준비을 하시다가 갑자기 찾아온 복통과 함께 장 협착증으로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어지러워진 방바닥에 백일 된 아들을 놓아둔 채로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 모정에 아마
이승도 그리 쉽게 떠나지 못하셨을 것 같다.
모두 나중에 들은 얘기로 사고사인지 병환으로 병원에서 돌아 가셨는지 무엇인지는 지금의
나로서는 답답하나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아버님 생전에 몇 번 물어보았으나 횡설수설
하는 대답 속에 그 당시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관계로 주변을 편하게 마무리 하기위하여
본인이 세상이 싫어 자살 하였다는 이야기까지 있어 나는 큰이모,작은이모,세검정 외숙모,
외가집 사촌 누님,형님들 까지 두루 물어봐도 모르거나 일치된 신빙성 있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얼마 전 동대문에 사시는 사촌 큰 형님이 그 당시 20살로 큰 아버님로 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잔치 준비하시다 갑자기 배가 아파 병원에 가셨는데 장협착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이 그중 가장 믿을 만하고 많은 사람으로 부터 전해들은 슬픈 과거사로
가련한 어머니로만 기억하고 있다.
그 후 나는 이곳 저곳 젖 동냥을 하며 겨우 살아가다가 불행 중 다행으로 피난 내려온 좋은
유모를 만나 유모의 친 아이와 반쪽의 젖으로 연명하다 없을 때는 콩 나물 죽으로 때우며
1년여 동안 엄마 없이 지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콩나물 음식을 가장 좋아 하는데
얼마 전 책에서 봤는데 콩나물이 보약보다 더 좋은 음식이라고 하여 지금 내가 불행 중에도
좋은 일이 있듯이 그때 덕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돌이 지나서야 새어머니가 들어오시고 그나마 안정되고 새로운 유년기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 친할머니와 고모들도 같이 살 때 인지라 살림도 어려웠고 혼란스러운 시기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상식이하의 가난한 생활과 기적 같은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새어머니는 한명의 내 동생을 낳고 쫒겨 나듯이 우리 곁을 떠난 후 몇 분의
새 어머니를 맞아 계모를 어머니라 부르며 참으로 다사다난하게 어린 유아와 유년 시절을
불행하게 아니 운 좋게 탈 없이 보낸 것은 지금도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하늘에서 이승에
놓아두고 온 불쌍한 아들을 끝까지 보살피고 운명을 굳게 지켜 주신 것 이라고 확신하며
죽음으로도 끊을 수 없는 모자의 정이 지금의 나를 키우고 지켜 주셨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새 어머니들 사이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아버님과의 불화와 무관심 속에 어느새 10대가되어
지금도 내 머리 속 기억으로 남아있는 과거의 시작이고 이자서전 이야기의 첫 페이지입니다.
그 당시 아버님께서 병원을 위탁 경영하셔서 전국을 무대로 개업을 수시로 하여 우리 삼 남매는
( 나보다 세 살 위인 누님과 바로밑의 남동생 ) 당연히 여기 저기 따라다니며 초등 학교는
평택 송북 초등학교를 입학하여 안양 만안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서너 군데 더 전학 다니고
중학교는 간신히 논산 대건중학교에 입학하여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불우한 청소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어머니에게는 친정이고 내게는 외갓집인 서울 서대문 세검정에
찾아가서 어머니의 어린 시절과 지난 이야기들을 많이 듣게 되었고 그간 어머님을
늘 그리워하던 중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 스스로 불쌍하신 비운의 어머님을 추모하기 위해
돌아가신 기일에 맞추어 제사를 지냈다.
다행히 그 당시 새어머니께서도 혼쾌히 승낙하시고 제사상 차리는 것도 도와 주셔서 지금껏
50여년 넘게 기제사를 한번도 거르지 않고 모든 자손이 다모여 정성껏 모시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어머님이란 생전 보지도 못하고 그나마 남겨놓은 사진도 없어서 상상 속에
그윽한 모습만 떠 올리며 참으로 26세의 젊은 나이에 기구한 운명을 사셨고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떠안고 이승을 하직하신 비련의 주인공, 거기다 백 일된 아기를 이승에 두고
떠나야만 했던 그 애끓는 고통을 떠 앉은 채 가신 어머님,
저는 그러하신 어머님 생각만 하면 비통하여 더 애틋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명복을 빕니다.
어머님에 대한 사모와 그리움은 지금도 넘쳐나고 있어 딱 한 장 남은 흐릿한 사진이 있어
옆에 놓고 매일 보면서 집안 대소사 보고도 드리고 손주들 오면 인사도 시키고
특히 어려울 때, 진짜 힘들어 죽고 싶을 때 사진보고 많이 울기도하고 기도 드립니다
험한 세상에 항상 어머님은 나의 수호신 이셨고 종교 그 이상으로 지금의 나의 성장과
성공 그리고 가족과 같이하는 행복한 현재, 오늘의 운명은 언제나 어머니와 함께였고
보살핌 이셨습니다.
얼마 전 어머님을 떠올리며 사무치게 그리운 추모시를 쓰려는데 어머니라는 제목 세 글자를 쓰고
며칠 동안 슬픈 마음에 울음만 나오고 글을 이어 나갈 수가 없어 한참을 지나서야
내 마음을 미흡하나마 표현하여 어머님께 드리는 시입니다.
어 머 님
윤 해 균
세 글자 만 으로도
벌써 가슴이 울먹이고
눈물이 솟아 나옵니다
한 번 불러보지 못했지만
하늘보다 더 귀한 분이셨고
아직도 찾아 헤매는 품 안입니다
엄마의 젖과 보살핌이 있어야
살아 갈수 있는 백일 된 아이
누워서 버둥대다가 살아남아
원망했던 저를 꾸짖고 있습니다
얼마나 힘이 드시고 절망적이면
억울함과 아기 걱정으로
편하게 사시지도 못한 어머니
어머님은 나의 수호신입니다
낳아주시고 하늘에서 더 깊은 보살핌을 준
어머님께 슬픔 가득한 사랑을 바칩니다
이승에서의 시간이 너무 짧았을 뿐
어머님의 사랑은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만 힘들어 하시고
명부에서나 편히 쉬세요
효도하지 못한 아들의 바램입니다
유일하게 한장 남은 어머님 사진 안고있는 아이는 한살때 돌아가신 나의 형님
2-2 잊어버린 청소년의 꿈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년기 시절 기억을 제대로 떠 올릴 수 없지만 10살이 지나가고 중학교에
입학 하면서 부터는 시대 별로 기억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울에서 태어난 나는 여섯 살 때인가 영등포에 아버님이 큰 병원을 운영하며 살았던 기억이 나고 까만 찝차를 타고 유치원을 다녔던
단편적 기억과 옆집에 그 당시 유명했던 영화배우 허장강씨가 살았고 그 집 아들인가 하는 곱추와 친구하며 같이 놀던 생각이 난다.
그 뒤는 평택 송탄으로 내려가 송북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여 세 살 터울인 손위 누이와
다정히 손잡고 둑길을 따라 걸어서 학교 간 기억도 나고,
남동생과 싸운 적은 없는데 나보다 곱고 어린 탓에 어른들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하여 부러운 시샘을 했었던 일과
어린 시절 단편적으로나마 생각나는 일 등등은--
-아이들과 저수지에서 물놀이하다 물뱀이 헤엄쳐 오는 것을 보고 놀랐던 일,
-낮잠 자다일어나 아침인줄 알고 부랴부랴 또 학교로 갔다가 오후반 수업시간 교실에 들어가 창피 당하던 일,
-개울물에서 헤엄치다 깊은 물에 빠져 허우적일 때 동생이 손을 잡고 꺼내준 일,
-아버님 친구 분들이 오셔서 동생한테만 장난감을 주어 샘내던 일,
-동생과 재래식 변소에서 장난치다 빠져서 할머니한테 혼나던 일,
-집나간 새어머니가 몰래 오셔서 새 옷을 사주셨던 일,
-매일 늦은 밤 술 취해 들어오신 아버님 주정 속에 세 남매 모두 깨워 군기 잡는다고 해군 대장, 육군 대장 차렷하고 임명하시던 일
( 안 좋았던 기억으로 나는 성인이 되어 지금까지 도 술 먹고 집에 오면 술 취한 내색 없이 더 순해지는 좋은 버릇을 고집한다 )
-모든 식구가 모여 밥 먹을 때 내 국에 아끼고 남겨둔 고기를 사촌형이 “해균이는 고기를 안 좋아하네“ 하고 낼름 고기를 가져가 울었던 일,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인가 또 새어머니가 오셔서 어색하게 인사하던 일,
-기차역 플랫폼에서 사고로 기차 발판에 넘어져 다리를 심하게 다쳤던 일,
더 많은 사연이 있었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 과거 어찌할 방법이 없으니 잊을 수밖에 그러다가
중간에 부산 영도에서도 잠깐 살았던 적도 있었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안양 읍민관 극장 앞에서 규모가 큰 병원을 개업하여 세동생과
누님 여섯 가족과 큰아버님 식구까지 열 여섯명대 식구가 함께 살다가 2년도 채 안되어 다시 의료사고가 나서
논산 연무대로 병원을 줄여서 쫒기듯 이사를 갔다.
그때 당시 안양 만안 초등학교를 졸업 때 나는 성적이 상위권이라 서울 배제 중학교에 응시 했으나 시험에 낙방하여 후기인 배문 중학교에
입학 예정 이었으나,
아버님 따라서 연무대에 살면서 논산 대건 중학교에 입학하여 1년여를 다녔다.
얼마 전 친구가 논산에 있어 55년 만에 연무대 살던 곳을 찾아가보니 육군 훈련소 정문과 버스터미널 등은 그냥 있는데 2차선 비포장도로는
4차선으로 포장되어 새 건물이 들어서고 할머니와 살던 집터는 공원으로 바뀌었고 극장, 시장, 아이스케이크 점, 구두 방 모두가 사라지고
동네사람들의 얘기로만 이곳저곳 가르쳐 주어 알 수 있을 정도이다.
그 당시 기억으로는 --
-논산 대건 중학교에 처음 들어가 서울에서 왔다고 텃세하는 동네친구들과 학교 뒷산에서
싸움하던 일,
-논산 훈련소 앞에서 버스타고 통학하던 일,
-누님이 다니던 센뽈 고등학교에 놀려가던 일,
-신작로 끝에 케익 점 남학생이 누나 주라는 연애편지 배달하던 일,
-연무대 시장 만화방에서 동생과 밤늦게까지 놀던 일,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바둑을 배우던 일,
-차비가 없어 학교를 못가니 할머니가 시장에 가서 돈을 꾸어 주시던 일,
-그리고 비둘기 사냥, 극장에서 나오는 음악소리,-
-동생과 다투다가 내가 던진 재떨이에 머리를 심하게 다치게 한일.
-아버지 교도소 면회에 동생을 떼놓고 갈 때 버스를 쫒아오며 울던 모습.
-자다 일어나 아버님 술자리에서 처음 먹어본 탕수육의 달콤함,
-할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칼국수 추억까지 모든 것이 회상의 도시 논산 연무대에 오니 주마등처럼 옛 생각이 나서 그날 밤 핑계 김에
논산 친구랑 옛 얘기와 추억과 함께 술을 많이도 먹었던 것 같다
아버님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만주에서 병원 일에 종사 하시다 종전 후 한국에서 병원을 개업하려는데 중국면허가 한국에서 인정을 못 받아
면허 없이 병원을 하시다보니 빌려서 영업하게 되었다.
( 아버님은 이때 면허를 내기위해 전 재산을 사기로 잃으시고 그 타격으로 젊은 나이부터 자포자기 하시며 폐인 가까운 생활을 하시게 된 원인이 되었음)
매번 위탁으로 병원을 개업하다 보니 단속 관계로 한곳에 오래 할 수가 없는 구조라 전국 이곳저곳 돌아다니게 된 이유였다.
이 덕택으로 유년기에 여러 지방을 살게 되었고 ( 충남 논산, 연무대, 광천, 영동, 부산동래, 서울 등촌동, 경기 안양 등 생각나는 지역 외에도 더 있는 것 같다 )
그 덕분인지 아버님이 의도 하지는 않으셨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국내외 어디서든 환경 적응력이 뛰어나고
새로운 학교 친구와의 친화력 노력을 많이 한 탓에 대인관계가 원만 하고 긍정의 마인드가 몸에 배여 사우디 오지에 나가서도 사막에 공장을 짓고
대기업에서 임원까지 하다가 맨손에 창업하여 천 억대 매출을 올린 회사 경영까지 잘 살게 된 계기는 아버님이 만들어 주신 환경에서 얻은 학습효과와
교훈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그간 지방으로 떠돌던 방랑시대를 마감하고 마지막으로 피해 어머님의 친정인 경기도 안양으로 온 때는 1965년 내 나이 13살 중학교 2학년 때로
한일협정과 월남파병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으로 모두가 어려운 가운데 허리띠 졸라매고 새마을 운동을 한참 할 때이다.
1년도 채 안 되는 짧은 논산시절의 혼돈 속에서 살다가 다시 안양으로 피해와 또다시 1년여 안양 중학교에 편입하여 다니다
결국 졸업은 충남 광천 광흥 중학교에서 마치게 되었다.
아버님이 안 계신 집안에 수입은 어머니가 방직공장에 다니시며 5명의 아이와 외할머니 까지
철길 옆 작은 단칸방 판자 집에 살다보니 모든 것이 궁핍하여 먹는 것 입는 것 부족한 가운데
어머니의 생활력과 외할머니의 억척스러운 농사일 덕분에 굶지는 않고 근근이 살아가던 시기로 1960년 중반의 주변 이웃 모두가
우리와 같이 어렵게 살던 시대였다.
나 역시 집안일도 도우며 특히 먼 곳에서 물을 길어 와야 돼서 물지게를 지고 큰항아리에 채워 넣는 일과 청소가 내 몫이었다
그래서 한참 성장기에 심한 영양실조에다 무거운 물지게를 매일 들다보니 키가 남들처럼 크게 자라질 않아
( 지금도 오른쪽 다리가 짧은 것도 물을 한손으로도 날랐기 때문임)그때도 제일 싫은 일이었으나
나 말고 할 사람이 없었기에 의무적으로 자진하여 하였고 학비도 낼 형편이 안 되어
아침에는 조간신문 ( 조선일보 ) 배달에다 방과 후에는 삼덕제지 회사 사장이 키우는 말먹이로 풀을 뜯어다주고 돈벌이를 하였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날정도로 참으로 처절하고, 억척스럽고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고 그보다도 이복형제들과 같이 사는 일반적 공식과 소외 방법에서 사춘기 때인
나로서는 작은 자존감마저도 버려야 할 정도로 비참하였다.
외할머니와의 공생 관계에서 잊지 못할 애증의 관계로 잘 지내던 것 같다 친손주가 아닌데도 잘 거두어주셨고
나 역시 집안일 농사일 다른 형제보다 많이 도와 드렸다.
하지만 피가 안 섞인 나와 친손주인 동생 둘하고는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차별은 있었는데 당연히 먹을 것과 맛있는 것은 동생들이 우선이었고
그것도 고전적이고 순진한 친자식 사랑으로 표현 된 것일 뿐인데 나는 개의치 않았고 차별에 순응하고 당연한 일반적 모정으로 받아드리고 타협하고
순응했던 내 자신이 이제와 생각하니 참으로 무서운 아이 였던것이다.
지금도 그때 쓴 일기를 보면 사랑은커녕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이야기한 지옥세상의
구렁텅이 묘사나 저주, 혐오의 내용뿐이다 거기다 가끔 터지는 아버님의 술주정과 못 볼 것 같은 일탈의 행위들 13살의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힘든 시기였고 내 일생동안 잊지 못할 불행과 고통스러웠던 나날 이였다.
기댈 곳도 상의할 곳도 없는 약한 내 모습에 화가 나서 죽고 싶을 정도로 싫었던 이 생활이 생각보다 길게 이어져
내가 고등학교 3학년 실습 나가 정식으로 돈 벌 때까지 지속 되었다.
다행히 죽지 않고 탈 없이 견뎌낸 것도 대견하고 또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용케 버텨 온
지금을 보니까 유전적으로 참을성과 극복 DNA가 있었고 다시 한번 상기하지만 나를 이렇게
힘든 세상에 놔두고 가신 어머니의 가호로 기적같이 살아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후 나는 많은 세월 살아오면서 해외 현장에서, 실직으로, 사업실패로, 인간관계로 무수한 어려운 고비 ,힘든 일, 위험한 상황이 많았다
그러나 소년시절에 이미 겪었던 고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고 상황을 극복하는데 서글픈 이야기지만 좋은 경험이 가르침이 되었고
견딜 수 있는 자신이 있는 것이다 하물며 1973년 모든 장성들이 힘들어하는 군 생활이 나에게는 천국 같이 편하게 느낄 정도였으니
이것 또한 아버님이 의도치 않게 나에게 물려준 아니 짐 지워준 소중한 교훈으로 사는데 잘 훈련이 되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 정도이다
옛날 격언에 “젊어 고생 돈 주고도 못 산다” 이게 나를 두고 한말인가 맞는 말이 분명하나 헛헛하고
가슴이 찌릿한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시간이 지나고 그러면서 철이 들면서 머리통만 크고 체구는 왜소했지만 특유의 통찰력과
남보다는 좋은 머리를 갖은 10대의 꿈과 희망을 갖고 세상을 보게 되었다.
우선 돈도 많이 벌어야겠다는 것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혜와 끈기 ,참을성을 가진 소년에서 청년으로 변화 되는 순간 이었다.
그때 어려운 생활에서 나에게 단하나의 위안은 매일 한탄 시와 함께 일기를 쓰며 현실을 비판하고 심하게 토로도하고 부정도하였지만
미래를 향한 밝은 꿈과 희망을 빠지지 않고 적어 놓았고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며 힘들 때 다시보고 추억하며 더 슬퍼하기 보다는
그때보다는 더 나은 환경과 문제를 다루면서 다시금 지혜와 용기를 어린 시절 살아온 모습에서 배웁니다.
고등학교 입학후 친구들과 두번째 필자와 지금도 만나는 절친 최덕근
3. 제2의 인생이 시작되다
1) 사회 첫 걸음을 마포에서 시작하다
2) 초창기 플랜트 건설 엔지니어링 입사기
3) 처음 타보는 비행기 안에서
4) 두 번째 가는 중동 현장이야기
3. 제2의 인생이 시작되다
3-1) 사회 첫걸음을 마포에서 시작하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무더운 여름 어느 날 학교로부터 방학 중이지만 한번 오라고 건축과 담임 최준호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당시 안양 공업 고등학교 3학년 졸업반이면 여름방학 때부터 산업 현장이나 공장으로 실습을 나가는걸 알고 있었고 가정 형편상으로도 기회만 되면
친구들 끼리 경쟁하며 먼저 나가려고 기다리고 있을 때라 기대를 갖고 도착하니 담임선생님과 또 다른 한분이 계셨는데,
우리학교 3년 선배 한삼석 소장님으로 인사드리자 마포에 있는 건축 설계 사무소에 실습
나갈 수 있냐고 하셔서 망설임 없이 승낙하고 바로 출근하였다.
졸업 때까지는 실습기간이라 많은 돈은 받지 못하고 첫 월 급여가 3000원으로 기억난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고 이제 와서 생각하니 이것이 내 인생에 큰 방향과 살길을 만들어준 행운의 기회였던 것이다.
여기서 배운 건축 기계설비 설계기술로 자연스럽게 플랜트 설계를 전 엔지니어링에서 하게
되었고 나아가 경남기업과 동아건설에서 건설기술과 기술용역을 영위하며 건설 호시절에 잘 먹고 잘 살았고 그 후 건설과 설계 회사를 창업하여
중견기업을 경영하고 지금은 대학교에서 건설 EPC 강의를 ( Engineering,Procurement,Construction 즉 플랜트 건설에서 설계, 구매, 공사를 한꺼번에 Turnkey로
수행하는 공법의 약자 ) 하고 있으니 잘 내디딘 첫걸음의 행운이 틀림이 없다.
설계사무소 정식 이름은 회사라기보다는 서너명이 일하는 “이재호 건축설비설계사무소” 장소는 국내에서 처음 아파트를 지은 마포 아파트 13평형 6동 1층 101호가
사무실이며 방 두개 거실하나로 제도판을 세 개 배치하여 일하는데 나도 아파트를 처음 보아 신기하였지만 한식 가옥에만 살다보니
여간 편리한게 아닌 좋은 구조였다 그래서 최근 까지도 주거로는 아파트를 선호하고 총 가구 수의 70% 이상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로부터 약 1년여 간 그간 학교에서 배웠던 건축설계에서 실제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실무을 익히는 시기였고 나이도 젊었고 이재호 소장님이 잘 가르쳐 주시고
분위기도 좋아서 빠른 속도로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
학교 다닐 때도 건축 제도 만큼은 빠른 손재주로 잘 그려 경기도내 설계 경진대회에도 나가고 반에서도 1.2등을 하던 총명함 덕택에 그 당시 1년여 배운 건축 설비설계
덕분에 작은 주택이나 건물은 혼자서 냉난방 부하계산해서 설계도 만드는 것까지 수행 가능하여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기술자이면서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
단 기간에 사무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부지런하고 똑똑한 설계사로 칭찬도 받고 마침내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실습 딱지가 떨어져 월급도 6000원으로 올라 집안 살림에도 도움이
되었고 그간 고생한 식구들에게나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때가 1970년으로 경부 고속도로가 개통되던 해이고 비틀즈가 마지막으로 발표한 렛잇비
노래가 라디오와 마포 아파트 단지 내 스피커에서 새마을 운동 노래과 번갈아 나올 때이다.
지금 생각해도 모두 어렵고 할 때 나를 거두어주시고 고등학교 갓나온 학생이 무엇을
얼마나 안다고 서투른 나를 이것저것 잘 가르쳐주시고 키워주신 인자하고 자상했던 이재호
교수님이야 말로 사회에서 처음 만난 은인이자 내게 지금껏 잘살도록 실질적인 희망과 가르침을 주신 분이셨다.
1년하고 몇 달이 지나 소장님 이재호 교수님이 ( 당시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 미국으로 이민 가신다고 전격적으로 말하고 나에게는 재능이 아까우니 더 좋은 곳으로
소개시켜 주겠다며
용산역에 있는 철도청으로 데려가서 철도청 건설국장으로 있던 친형한테 나를 부탁하여
쉬지 않고 바로 철도청 기능직 9등급으로 입사하여 바로 지금 서울역 앞에 있는 서울 스퀘어 건설현장 사무실에 발령을 받아 근무하는 또 다른 좋은 기회가 되었다.
가시기전에 건축설비 설계에 관련된 기술서적을 나에게만 주시고 홀연히 떠나시고 한동안 옛정을 잊지 않고 편지도 주고받으며 감사의 인사를 수도 없이 드렸으나
지금은 연락이 안 된지 오래되었다.
지금의 서울 스퀘어 빌딩은 1970년 그 당시 국내 최고, 최대의 건물로 26층 높이에 건축 연면적이 대략 12,000평의 대형 건물로 처음에는 철도청 본사 건물로 착공하여
건설하였으나 ( 70년 도급순위 3위인 경남기업이 시공 )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대우그룹으로 인수되어 한동안 대우본사 건물로 사용하다 지금은 서울시 소유
서울 스퀘어로 복합 도시형 건물로 서울역 앞에 가면 향토색 모양으로 지금도 볼 때마다 50년 전 내 모습을 회상 하곤한다.
처음 현장에 갔을 때 6층 공사 중으로 나는 철도청 발주처 소속으로 현장사무실에 근무하며 건축 설비공사 감리와 현장 설계도면 작성도하는 기사 보조 형태의 근무였다
학교에서 3년간 건축학을 배우고 1년간 이재호 건축설비 설계업무를 한 뒤라 눈치도 있고
의외의 실력을 발휘하니 건설현장 기사들이나 윗사람한테 신임과 총애 받으며 인기도 많았다 .
현장 사무실 뒤에는 소공동 유흥가 거리이고 남부 경찰서 뒤의 설렁탕집에서 맛있는 점심이 그때 100원 하였고 윗분들이 꼭 나를 데리고 다녀 맛있는 음식도 먹고
술도 조금씩 그때 배운 것 같다.
주로 하던 업무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설계 변경이나 공사용 도면작성 견적업무이고 설계는
나무 제도판 위에다 티자를 놓고 손으로 빠르게 그린편이고 공사비 견적할 때는 그 당시
계산기가 없을 때라 ( 카시오 전자계산기는 1972년부터 보급되었음 ) 손으로 돌려서하는
기계식 롤러 계산기를 수동으로 또는 주판으로 하다 보니 매일 야근에다 툭하면 밤샘 작업을 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에서 호기심과 건설 현장 배움의 경험하는 기회를 감사해하며 보람도 있고 나날이 실력도 향상되어 약관의 20세 나이에 설계와 현장 공무를 익혀
어느새 건축기계설비 초급기술자로 훌륭하고 빠르게 성장하던 시기였다.
아파트 공화국 신화를 쓰기시작한 국내 최초 마포아파트 단지
3-2 초창기 플랜트 엔지니어링 입사기
( 전 엔지니어링에서 )
서울 스퀘어 건설 현장에 온지 약 1년여 흘러 건물도 26층까지 골조가 완성될 무렵 또 다른 운명의 새로운 기회가 나에게 찾아왔다 현장 사무실에서 일 잘하고 설계를
빨리하는 친구로 소문이 났던 터라,
어느 날 외부에서 키 크고 말쑥한 신사 한분이 사무실에 오셔서 내가 설계하는 모습을 유심히 보시고 그날은 아무 일없이 지나고 나중에 알고 보니 대한민국 최초의
플랜트 엔지니어링을 창업하신 전민제 사장님 (그 당시는 대한 석유공사 부사장) 이셨다.
평소 나를 많이 아껴주시고 총애하던 같은 사무실 토목 기사였던 정진행 형님이 소개하고
직접 와서 보고 마음에 들으면 스카웃하는 현장 검증에 합격한 것이다.
그것도 철도청 봉급의 2배가 넘는 12,500원의 파격적인 월급으로 국내 최초로 설립되는 플랜트 설계 엔지니어링 회사에 창립 멤버이자 경력 사원으로 참여하는 분에
넘치는 영광을 갖게 되었고 지금껏 대한민국 플랜트 엔지니어링 사번 넘버3 (사번 1번은 전민제 사장님/ 창업주, 2번은 사장 조카인 이학규씨 다음이 3번 윤해균 )
이라는 행운의 사번 ,군번이 되었지만 후에 합류하신 훌륭한 분들이 연배가 있어 내놓고 말하기가 어려워 숨기고 있던 이야기였다.
요즘도 대학교 강의 때 학생들에게 공공연히 대한민국 플랜트 건설기술 창업자 다음 3번의 Legend와 건설 1세대라는 자부심과 함께 명 강의로 인기가 있는 교수로
평가되어있다.
어찌되었든 어려운 환경 ,어둠의 과거는 뒤로하고 1971년 7월 제2의 인생과도 같은 신세계가 나에게 전 엔지니어링이라는 이름을 가진 훌륭하고 의미 있는 회사
입사와 함께 찾아왔다.
당시 1971년 상황으로는 군사정권이 들어와 제8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 뒤이어 1972년 10월 유신 헌법 선포 ,7.4 남북 공동성명 남북 적십자 회담과 국가비상사태
선포로 국내 정세는 뒤숭숭하였고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과 파리 협정,미군 베트남 철수를 시작할
때로 세계가 평화무드 속에 국가 경제에 박차를 가할 때이다.
한국도 1972년 울산 석유화학 8개 공장을 준공하고 중화학 공업에 중요 정책으로 밀어붙이던 시기로 군사정권에서 들고 나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도
발전 플랜트와 함께 석유화학 공장 증설이 가장 큰 현안 이었다.
그러나 국내에는 플랜트 엔지니어링 기술이 없어 미국의 Flour Corporation, Becthel 이나 일본의 Chiyoda, Toyo Engineering, 등 해외에서 기본 및 상세설계까지
의존하던 때로 국내에서 자주적인 플랜트 건설 기술보유가 시급하고 정부에서도 많은 플랜트 건설을 시작 할 시기로 국내 플랜트 건설의 자력기술이 어쩔 수 없이
탄생될 수밖에 없는 태동기였다.
이때 대한 석유 개발공사의 부사장으로 계시던 전민제 사장님께서 미리 예견하시고 국가의 부름과 책임을 갖고 국내 처음으로
플랜트 엔지니어링 회사를 창업하신 회사가 전 엔지니어링 주식회사 였다.
전 엔지니어링은 미국의 Flour Corporation 의 표준 설계 기술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플랜트 설계 국산화 하는데 앞장서서 하나둘 익혀서 공부하며 설계도하고 열심히
하였던 기간 이었다.
나는 21살의 어린 나이이지만 벌써 플랜트 설계와 유사한 건축설비 설계를 하였고 건설현장에서 기계 설비공사 경험까지 2년여의 경력을 갖고 있던 장점이 있어
가장 먼저 익히게 되어 많은 실무 일에 투입되어 실적도 쌓았고 그 당시 미국식 영문으로 실기 테스트에도
막내인 내가 나이 많은 형님들을 재끼고 종종 1등을 차지했던 기억이 나고 사장님의 총애로 힘찬 성장과 함께 배움의 절정 시기였던 것이다.
바쁜 회사일 관계로 집안 생활이 좀 나아지긴 했지만 항상 시끄럽고 잔인한 시간은 계속되고 있었고 다만 보거나 간여할 수가 없었던 것 뿐 불행한 집안은 힘겹게 진짜
근근이 유지되던 1972년 여름 수도권을 통과한 태풍의 영향으로 안양천 대 홍수와 함께 석수동 뚝 옆에 살고있던 집이 물에 잠겨 피해도 극심하여
퇴근해서 와보니 지붕만 남겨놓고 모두 물에 잠겨 아버님과 동생은 TV만 건지고 아무것도 못 건지는 큰 재해로 덮친데 업친꼴이 되었다.
다음날 물이 빠지고 집안의 더러운 오물을 걷어 내는데만 며칠이 걸릴 정도였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랄까 회사에서 수재의연금을 사장님이하 전직원이모아 내게 준돈이
지금 자세히는 모르지만 꽤 큰 금액으로 시골에 가서 집살 때 보탤 정도였다 그리고
안양시에서 수재민에게 모두 시영 13평 아파트 분양권도 주어 수해로 인한 위기에서주변
도움으로 새로운 기회가 온다는 세상의 이치를 또다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때 도와주었던 전 엔지니어링의 많은 동료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감사를 드리고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동료들의 모임을 전초회
( 전 엔지니어링 초창기 멤버란 뜻 )로 만나 이제 나이들이 많아도 우의를 다지며 매번 뜻 깊은 추억의 시간을 갖곤 한다.
2년여에 걸친 전 엔지니어링의 사회생활은 한창 젊은 나이의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처음으로 조직적이 사회를 배우고 어느 정도 돈을 벌어 집안에 보탬이 되었고 절음의 행복한 추억의 시간과 함께 그것 보다 중요한 것은 플랜트 건설의 엔지니어링 설계를 체계적으로 배운 것으로 50년 동안 지금껏 갖고 있는
건설 기술 ,관리, 경영 등 모든 면에 잘 활용하여 쓰는 바탕이 되었다.
내 또래 친구들은 대학교를 다닐 때 나는 일하면서 돈도 벌고
더 큰 사회 공부를 한샘으로 집안 형편으로 제때 배우지 못한 대학공부를 나중에 중년의 나이에 졸업했어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았고 학력 핸디캡이 있는 직장 내에서도 더 악착같이 배우고 일하여 나이에 비해 진급도 빨리하고 더 훌륭히 평가받고 모든 면에서 솔선수범하고 늘 선두에 섰던 이유가 되었다.
이재호 서울대 교수님 ( 이재호 건축설비 설계사무소 )
1970년 서울역앞 서울스퀘어 건설현장 - 기계설비 공사관리 보조시절
서울역앞 철도청 본사건물 공사현장에서 ( 1970년 9월 )
현재는 "서울스퀘어" 건물임
전엔지니어링 입사후 필자 근무모습 ( 1971년 7월 )
1973년은 군사정부의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공포하여 학생들이 데모도하고 그 당시
근무하던 서울 중구 충무로2가 62-3 뉴 서울 빌딩 ( 세종호텔 옆 ) 8층에서 보면
유신 헌법 준수라는 플랭카드가 건물마다 걸려있어 무슨 뜻인지도 모르게 지나간 정치 과도기시절이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정신없이 사회 생활한지 4년째 되던 1973년 7월 군대 영장이 나와 입대를 아쉬워하는 회사를 뒤로하고 육군에 입대를 하게 되었는데 집안일이나 생활보다 아버님 걱정이 태산이고 특히 누님의 나이도 많은데 혼사얘기도 없던 터라 세검정의 상국이형님한테 친구 분 중 미혼인 사람 소개 부탁해서 ( 지금의 매형이 되었음 ) 맛선 후에 약혼, 결혼까지 잘 이루어지고 지금껏 나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한창 더울 때 입대라 뜨거운 수색 30연대 연병장에서 6주간의 훈련소 생활이 그래.도 남들보다는 수월하게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군대 생활에 잘 적응도 하였지만 힘든 훈련과 열악한 병영생활이 나에게 있어서는 사회생활보다 더 쉬웠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간 얼마나 마음고생 ,힘든 일 ,어려운 생활에 비하면 군대가 차라리 더 나았다고 착각하는 처지가 더 서글퍼지는 대목은 내 어릴 시절 참으로 기구하고 소설 같은 사나운 팔자 때문이다.
3년이라는 군 생활이 나에게 있어 공백기는 아니 였던것이 고된 행군과 훈련은 나에게 강인한 체력과 인내를 길러 주었고 이등병에서 병장 지휘관까지의 계급체계는
나에게 조직속의 역할 수행력과 통치력, 위험할 때 방어교육, 분대 지휘, 전투력 강화훈련, 내무반에서의 상하 관계와 대인관계 등 많은 것을 체계적으로 익힐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고 지금까지도 회사를 잘 다니고 원만한 사회생활과 큰 회사를 경영하는데 도움이 많이 된 군 생활이었고 지금도 젊음이 들에게 군복무는 국방의무이자 애국하는 의무도 있지만 군 생활을 통해 얻어지는 그이상의 성과도 있고 젊은 나이에 조국과,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훈련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아들이 해외 유학으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귀국하여 제때에 군 복무마치도록 독려하였고 내가 도원 건설 그룹 회장 때에도 군 필한 직원이나 현장 소장의 리더십에서 우월한 자질을 느껴 회사 지원자에게 입사나 진급 시 군필자에게 우선권을 주면서 우대를 하였다.
수색30사단 훈련소를 거처 102 보충대에서 첫 근무지는 강원도 춘천 외곽 이었는데 졸병 때 겨울을 맞아 강추위 속에서 계곡물에서 식기와 씨름 하던 일과 눈 내리는
한밤중에 졸린 눈 비벼가며 보초 서고 361 주특기라 통신 중가설시 카우 (cow) 신고 목 전주를 타다가 떨어져 다친 일 등등
군대 이야기라면 남들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약 2년은 춘천 통신 중 가설부대와 춘천 시내에 있는 KBS자리에서 파견 생활하다가 남은 1년은 원주 1군사령부 지하 벙커 내에서 말년을 무사히 잘 보내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1976년 5월 가수 이종용의 그때 히트곡 “너”( 낙엽 지던 그 숲속에 하얀 바닷가에 떨리던 손잡아 주던 너 은빛 같은 눈망울로 영원을 약속 하며---)를 부르며 아까시아 꽃향기 은은히 퍼지는 사령부 정문을 나오며 감격스러운 전역을 하였다.
1973년 8월 수색 30사단 훈련소에서
1976년 전역을 앞두고 원주 1군 사령부에서
入 隊
입을 다물고 어둠속으로 들어간다
가시가 피부로 스며드는 아픔
더 더 깊은 곳에서 체념해버린다
신도 찾지 않은 채 그도 너도 없이 혼자서
너무 흔한 공통된 어려움이
내게로 와 만나주고 사랑을 해버린다
1973.7.3일 어두운 용산역에서
除 隊
한밭 벌에 춤추던 내 젊음이
강해진 모습으로 부산을 떨어야겠다
모자와 먼지를 벗고
맑은 하늘에 몸을 말리고
새벽 같은 내일을 맞이하리라
1976.5.16 아까시아 향내가득한 1군사령부를 나서며
3-2) 초창기 엔지니어링 입사기
3-2)-1 제대 후 복직한 전엔지니어링
휴가 때마다 자주 들르던 전 엔지니어링을 제대하자마자 찾아가 쉬는 날 없이 바로 복직을 하였다 군입대전 2년여 동안 나름대로 성실하고 기술력을 인정받아 그것도 곧바로 설계 직 6명을 거느린 팀 리더 자리를 발령받고 바로 업무에 투입되었으나 3년여의 공백기도 무색하게 잘 적응이 되고 기술적인 문제도 잘해나갔던 것으로 기억 한다
회사도 입대 전 30여명에서 200명이나 되는 큰 회사로 커져있었고 나는 배관 설계팀 리더로 소속되어 사우디 SIR 석유 화학 플랜트 설계의 후속업무인데 배치도 작성부터 견적까지 이세영 부장님을 도와 야근을 불사하여 마치고 나니 내 실력도 일취월장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전 엔지니어링 본사건물이 광화문 한국 일보옆 합동 통신회관 빌딩이었는데 지금도
그 자리에 8층 건물이 있어 얼마 전 보니 흐릿한 옛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25살의 한창인 젊음인지라 매일 군대식 업무에 야근까지 하며 동료들과 끝나면 종로 1가
낙지 골목에 가서 감자탕을 먹으며 못 다한 청춘과 열정을 만끽하였고 가끔은 회사 위 삼청동 돌담길 따라 비밀리에 사내연애로 사귀고 있던 S양과 삼청공원으로 밤늦도록 아련한 데이트을 가지곤 하였다.
다시 복직한 회사에는 많은 여직원들이 있었고 내가 맡고 있던 팀에도 두 명의 신입여직원이 있어 나이가 비슷한 젊은 우리는 자연스럽게 친하게 지내는 동료 사이가 연인으로 변해 나로서는 뚜렷한 첫사랑으로 지금도 그 시절의 감정이 좋은 날로 기억되어있다.
또한 야근 후에는 항상 회사 앞 중국집 2층에서 자장면 시켜놓고 같이 먹던 배갈의 독한맛과 지금도 보고 싶은 동료들 이민 간 이유성, 석수의 임영근 춘천의 이인제 그리고 김수현씨 모두가 추억의 한 페이지를 만들어준 고마운 친구들이다.
이때 참으로 재밌는 에피소드가 하나있었는데 어느 날 열 명이나 되는 신입 사원들이 내 자리로 입사 신고하러 들어오는데 한명이 많이 본얼굴이라 불러보니 내가 군에 있을 때 소대장으로 있던 김학철 소위가 아닌가 포옹하다시피 반긴 이유는 이러하다
내가 30사단 훈련소를 마치고 102보충대에서 춘천 자대 배치로 첫날 신고를 할 때 소대장이
인적사항을 쓰라고 해서 입대 전 직업란에 엔지니어링 회사근무라고 써주었는데 그 당시에는소대장이 처음 듣는 용어로 내가 써놓은 엔지니어링을 갖고 계속 무엇인지 이해가 안 되었는지 화를 내면서 복잡하게 얘기 하지 말고 간단히 말을 하라 명령하면서 “야 임마 엔진 설계일 한거 아니야 하길래 겁에 질려 ”예“ 하고 수정하여 제출하고 그날은 잘 지나갔으나
졸병 시절 내내 나만 보면 엔진 설계하는 놈하며 찾아서 펌프나 주방 기계설비나 모터 고장 날 때마다 불려 가기도하여 나름대로 손재주도 좀 있어 기술자로 생색을 내며 고치기도 하였다 힘든 신참 때인데도 잘 보인 탓에 내가 MOS 통신 중 가설 공사 때 전주에서 떨어져 입원하고 있을 때 잘해주었고 그 당시 이등병으로 고달픈 생활의 자대보다 모두 좋아해서 가기 힘들다는 춘천시내 파견부대에 몇 개월 파견도 보내주어 늘 감사해하던 그 소대장 이었다.
대학교 때 전기공학을 전공했고 ROTC 로 군복무 마치고 나보다 몇 개월 뒤에 제대하고 신입사원이지만 나보다 두 살 연배로 내가 놀라서 앗 소대장님하며 인사하자 신입사원으로 들어와 눈치를 보고 있는데 기성 팀 리더라는 고참 사원이 아는 척하자 멋쩍어하며 놀란 모습 지금도 눈에 선하다.
첫날 종로 감자탕 집에서 환영자리를 만들어 술 한 잔 건넨 후 내가 소대장 한테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아니 소대장님 어떡하다 엔진 설계하는 회사에 오게 되었나요” 하고 놀리니
서로 껄껄 웃으며 많은 회포와 얘기를 나누고 나도 도울 수 있는 것 많이 도와주고 그 후로
친해져서 자주 야근 끝나고 만나 “목구멍 때 베끼려 갑시다”하며 무조건 종로 뒷골목 이었다.
전엔지니어링 초창기 시절 1972년 봄 야유회 ( 민석홍이사님, 윤진만이사님, 정진행님, 하상희님 비롯한 여기계신 모든분들이 대한민국
플랜트 엔지니어링 태동기 발전에 큰업적을 이루신 훌륭하신 분들의 귀한 사진입니다 )
-경남 엔지니어링 10년기록
제대 후 처음 맞이한 1976년 크리스마스 내 생애 그간 겪었던 고난을 뒤로하고 처음으로 가장 즐거웠던 년말분위기로 기억 된다 이때쯤 국내 플랜트 엔지니어링 회사도 고도 경제 성장시기와 맞물려 활발하게 발전되어 대부분의 대형 1군 건설 회사들 ( 현대, 삼성, 경남,
태평양, 대한, 대우, 대림, 럭키, 한양건설 등등 )이 플랜트 엔지니어링 회사를 만들어 기술자 인재 영입경쟁이 한창일 때이다 당연히 엔지니어링 선두주자격인 나에게도 몇 군데 제의가 들어와 그 당시 건설 도급순위 4위인 경남기업에서 설립한 경남 엔지니어링 창립멤버로 합류하게 되었고 전 직장의 급여에 3배가 넘는 13만원 가량의 (그때 대졸 신입 봉급이 5만원 선 )
고액 스카웃 이였다.
나는 군제대시 조건 없이 복직시켜준 회사의 미안함도 있었지만 주저 없이 창립멤버의 책임과 멍에를 벗고 새로운 회사에서의 출발을 하였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집안의 가장으로 어느 정도 역할을해야 하는 장남인 탓에 생활비도 보태고 조금씩 어려운 살림이 나아지는 하였으나 매번 터지는 집안의 돌발 상태는 아버님으로부터 시작되고 항상 내가 판결하고 마무리하는 식으로 매번 불효를 하게 되고 낮에는 회사에서 나름대로 보람을 갖고 이일 저 일하며 잊기 위해 취하고 일부러 더 놀고 더 일하고 밤에 집에만 들어오면 사나운 판결 자가 될 수밖에 없는 난장판의 밤이 셀 수도 없어 나는 지킬과 하이든 박사와 같은 양면성을 가진 시기였다.
동생처럼 집을 나가려고 학교 때부터 줄곧 많이 생각도 하였지만 매번 어머님과 동생들을 끝까지 내가 지키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맏이로서의 역할로 아버님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되는 힘든 가정사에 끝까지 감내와 어쩔 수 없이 지워진 굴레 같은 책임감으로 잘 버티어 낸 것은 분명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그나마 어릴 때 보다는 내가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생겼지만 그래도 총대매고 불효로 집안 보호와 정리를 하며 간신히 아슬아슬하게 하루하루 보냈던 것이다.
잊고 싶은 시절 다신 생각하고 싶지 않아 이 책을 쓰기 전에도 아버님에 관한이야기는 최대한 절제하여 돌아가신 아버님에 대한 나의 남은 못 다한 효도 예의입니다.
아 아버님 -
아버지 상백시 (上白是)
윤 해 균
시대동 진흙 골목길을
90씨씨 오토바이로 타고 나가
바람 같은 삶을 사신 암흑 시절
그때부터 불효가 된 못난 아들은
이제야 물어 봅니다
나를 낳고 숱한 핍박 속에 맡겨져
애초부터 체념한 야속한 운명
유산으로 남기신 바람의 흔적과
자라다 만 성장의 잘못 탓으로
찢어진 족보의 한 페이지
그토록 바라시던 세상의 유회를
한 번도 만들지 못한 지난 과오
이제 시대와 운명을 뒤로하고
참회 눈물로 가득 고인
내리 받은 심장으로
고동치듯 울면서 사모 합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병원 일을 파산과 사기로 관두시고 한 많은 10여년을 술로 버티시며
주변사람들 탓으로 괴롭히시는 아버님의 술주정 집안을 지키러 무릎 꿇고 사정도 해보고 불효로 맞서서 위협, 타협 하여봐도 며칠 뿐 계속 터지는 사건 속에서 묻힌 나는 10대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먹고 입지도 못한 가난한 궁핍 속에서 사랑은커녕 한순간도 행복하지 못하고 잃어버린 어린 시절과 젊은 숱한 나날들
지옥 같은 위험한 순간순간에 팔다리 멀쩡하게 살아 탈 없이 내가 버텨온 것은 기적같이
운도 좋았지만 돌아가신 어머님의 가호를 다시 생각 안할 수가 없는 상황 이었다.
나는 많은 것을 불우했던 어린 시절에서 배우며 바른 방향으로 자라왔다 어려웠던 과거를 반면교사로 삼고 선악을 구분하게 되었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 정직 그리고 하염없는 사랑을 지금껏 실천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어린 시절 겪었던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처연한 긍정의 마인드가 일찍 감치 내 몸에 이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10대중반에서 20대 중반까지 쓴 내 일기를 읽어보았는데 눈물이 나서 중간에 덮어버리고 말았다 좋거나 낭만적인 글은 하나도 없고 주로 쓰여 진 단어는 죽음, 슬픔, 피눈물, 낙담, 저주, 미친년, 두려움, 더러운 세상, 주정, 싸움질, 구타, 피바다, 설움, 지옥, 후회, 자살
그리고 어머님, 어머니 -
어머님
검푸른 하늘에 엄마별은
내 죄와 원죄 속에 전설로 사라지려합니다.
악과 악속에 버려진 나
가희 그대가 원망스럽 읍니다.
아니 그 속에 나를 잊으셨 읍니까
지금 내 몸에 냉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당신의 저윽한 품속으로 끌어 주십시오
찬송가를 들으며 고히 잠 들겠습니다.
( 1969.8.31.일 )
그때 그게 나였던가
밤하늘에 희미한 별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게
그때 그게 나였던가.
나 자신도 모를 죄와 나 자신이 주는 죄를 모르고 지냈던
그때 그게 나였던가.
화려하면 날뛰고 울적하면 스스로 죄인이 되었던
지금 이제 내가 그때 나였던가.
( 1969.7.1일 )
경남 엔지니어링 - 젊음의 노트
경남엔지니어링에서의 10년 근무는 20대 중반에서 결혼을 포함 30대 중반 까지 젊음의 화려한 행복 시기가 시작되는 장소는 충무로 인현동 중구청 앞 경남 기업 본사자리이다.
그때 만난 동료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영향력을 많이 주었고 평생을 통틀어 베스트 친구들도 다 여기서 만났으며 40년이 지난 지금도 기경회 ( 경남 엔지니어링 모임 뜻 )로 매월 마지막 수요일 모임에 지금도 10여명이 ( 김용웅 회장님, 이순영님, 김규진님, 홍창욱님, 배기종님,김동섭님, 최이섭, 김기열, 김동호, 박윤기, 이상민, 지종갑, 구봉규, 권석규, 황창현, 박현재씨 등등 )모여 옛 진한 우정을 바탕으로 노년에 유일한 친목으로 소중히 간직하는 모임입니다.
이 무렵부터 일도 많이 하고 매일 야근에 여관을 전전하며 밤샘 작업도 마다않고 시간이 나면 충무로 밤거리를 활보하며 볼링, 당구, 카드놀이에다 고스톱과 음주가무 배우는 정도가 아니라 제대로 빠져서 중독과 선수가 될 충분한 에너지와 높은 월급 그리고 펄펄 끓는 젊음이 있어 빠르게 겜브링과 밤의 문화에 심취할 시기였고 나 같은 경우는 골치 아픈 집에 늦게 들어가려고 더 심하게 방황 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나마 천성과 매사 조심스러운 몸가짐으로 바르게 방황을 하여 지금의 나와 우리 친구들이 모두 건재하며 훌륭하게 사회생활을 졸업 아니 마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추억은 그 당시 부장님이셨던 영원한 우리의 사부님이신 김용웅 회장님이 가르쳐주신 스키의 입문은 파격적이었고 가장 큰 추억으로 마이스키로 70년대 후반에
스키는 강원도 용평 스키장이 유일했고 연예인과 재벌들만 즐기는 고급 스포츠인데 한 달
월급에 가까운 마이 스키를 구입하여 토요일 서울역 앞 중앙고속 버스를 타고 용평스키장에서 동료들과 1박2일 짜릿한 실버,레드 직벽 스로프를 타고 일요일 저녁 서울 올라오는 버스에서 대관령 황태와 함께 먹는 경월소주의 맛은 지금도 결코 잊지 못합니다.
새로운 회사 경남 엔지니어링 인현동에 온지 1년여 지난 1977년 말
1974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국내는 유신헌법에 따른 긴급조치 1.2호와 육영수 여사 별세, 1975년 영동고속도로 개통,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1977년 수출 100억 달러 달성과 함께 국내 건설사들이 활발하게 해외로 진출하려는 태동기였다.
경남기업에서 (경남엔지니어링의 모기업 ) 해외현장 파견요원을 신청 받는 계기가 있었다.
1965년 현대건설이 태국의 도로공사를 520만 불에 최초 수주하여 1970년대부터 중동 해외건설 붐이 막 시작할 시기로 경남기업이 국내 4위업체이고 활발하게 국내외 건설 공사를 다수
수행할 때라 기술 인력이 부족하여 경남엔지니어링 까지 충원 요청이 와서 나는 주저할 것 없이 1순위로 신청하고 드디어 1977년 크리스마스을 바로 앞둔 어느 날 사우디아라비아 얀부 현장에 선발대로 가게 되었다 더구나 나에게는 태어나 털 나고 처음 가는 해외여행인 것이다.
김용웅 부장님과 용평 스키장 (레드라인 찻길)에서
중학교부터 ㅇㅇ친구 노대원과 홍도 배낭여행 (1971년 )
경남엔지니어링 입사동기이자, 동갑내기 총각시절부터 외롭고 힘들때 서로 의지하며 잘 성장하여 가정도 이루고
끝까지 진한 우정을 술잔 주고 받듯이 하던 절친 동료 김동호와 김기열 (일명 물새, 얼마전 안타깝게 고인이됨)과 관악산에서
3-3 처음 타는 비행기 안에서
비행기에서 담배 피우던 시절 1977년도에는 그랬다.
근무하는 사무실에서도 특히 놀라운 것은 비 오는 날 만원 버스 안에서 담배 피우는 것은 부의 상징이었고 돈 많은 사람들의 특권이던 시절이었으니까
1977년 년 말이 가까운 어느 날 부푼 기대와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는 호기심을 갖고 회사 단짝이던 김윤필씨와 함께 많은 근로자들과 사우디아라비아 현장으로 가기위해 김포 공항에서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모델 같은 스튜어디스의 안내에 따라 의자에 앉으니 커다란 비행기가 이륙을 시작한다.
신기하기도 하고 이때 김윤필씨가 옆자리에서 하던 말이 지금껏 또렷이 기억에 있는데
어- 어- 대가리가 들린다 와 뜬다,뜬다 하고 나에게 설명하던 모습이 선하다 .
잠시 후 안전벨트와 담배 신호등이 꺼지자 모두 담배를 피워대니 가스실에 들어 온 것 같이 비행기 안이 뿌연 연기로 가득하니 예쁜 승무원이 나와 오른쪽 윈 쪽 교대로 흡연해 달라고 통 사정을 하였다.
처음 타보는 비행기는 구름을 뚫고 푸른 창공위를 유유히 날으니 내 꿈도 함께 더 높은 곳을 향하여 가는 희망과 각오가 가득했던 뜻 깊은 첫 외국 행이였다. ( 이날을 시작으로 해외는 업무 관련과 여행으로 현재까지 무수히 많이 다니게 되었다 )
웃고 떠들다보니 마닐라를 거쳐 17시간 만에 사우디아라비아 제2의 수도 젯다에 도착하여 현지 직원을 만나 자동차로 300KM 떨어진 얀부 현장에 도착하니 밤 12시가 지나고 먼저 온 직원이 안내하여 거의 3일간 꼬박 걸린 긴 여행 끝에 현장에 도착하여 이윽고 나의 중동 르네상스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말 그대로 뜨거운 날씨에다 허허벌판 모래 바람 부는 사막위로 벽돌로
지은 가설 건물 몇 채가 전부인 초기 현장의 모습이고 우리가 거의 선발대 형식으로 와서
사막에 신화를 새로이 건설하여 써야할 운명 이었다.
현장명은 Yanbu Complex Facilities Plant 건설공사로 사우디 Royal Commission에서 발주하고 미국 Becthel사가 설계 감리하는 항구도시 얀부의 제반 산업 단지 조성공사로 경남기업이 상세 설계와 공사를 7000만불에 계약한 초기 시점이였고 당시 현장 근로자 포함 피크 때는 200여명이 일을 하였고 현장 소장은 나중에 나의 결혼식 주례를 해주신 이문형 전무님이었고 나는 현장 설계본부 소속 기계 및 배관 담당 이었다.
임시 숙소와 현장 사무실에서 짐을 정리하고 먼저와 있던 경남 기업 직원의 도움을 받아 현장 업무 시작과 현지생활 적응에 대해 설명 들으니 모든게 신기하고 생소했으나 잘 적응이 되었다.
허기사 대한민국에서 군대까지 갖다오고 혈기 왕성한 나이에 그 무엇인 들 못 헤쳐 나갈까
하는 오기도 있었지만 다행히 생활 지원이나 물자가 풍부하여 별천지 세상에 온 것 같았다.
방마다 에어컨이 달려있고 복도 냉장고에는 없는 과일이 없고 식당은 매일 평소 먹어보지도 못한 닭튀김에, 양고기, 스테이크와 통조림 ,싱싱한 야채 각종 쥬스도 공짜로 군대있을 때 통신 고장 수리하러 미군부대 켐페이지에 갔다가 미군 식당에서 짬밥 먹던 것과 똑같았다.
이때 너무 잘 먹어서 태어나 처음으로 몸무게가 55Kg를 넘어 60Kg에 육박하였다.
내가 맡은 업무는 현장 Engineering 설계팀에서 기계, 배관 공사에 따른 현장설계 ( Field Engineering ) 업무로서 미국 벡텔에서 설계한 기본 설계를 보고 현장 맞춤으로 공사용 설계 ( For construction Design ) 도면을 작성하여 발주처 승인을 받은 후 현장에 보내는 업무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업무는 순조롭게 시작하고 영문으로 된 사양서와 도면을 읽고 현장을 뛰어다니며 공사에 적합한 도면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그간 5년여 동안 미국 Flour 규격에 교육도 받고 적지 않은 경험을 살려 신통하게 잘 적응을 하며 나름대로 야근도 불사하며 한국인의 근성이 그러하듯 무식하고 부지런하게 따라잡았다.
다만 한 가지 문제라면 다 그리고 난 설계도면을 가지고 미국 벡텔사 승인받는 과정에서 영어로 대화를 해야 하는데 통 말을 못하여 당시 PM으로 계시던 손현구 부장님이 번거럽게 통역을 해주셔야만 해서 서울서 갖고 온 영어회화 책을 무섭게 파고들어 달달 외우게 되었고
조금만 아는 외국 혹은 사우디 사람 붙잡고 되지도 않는 영어로 씨 부리며 계속 말을 시키며 단련도 하여 조금씩 말문이 터질 때 손현구 부장님의 제안으로 사무실과 숙소에서 영어로만 대화하기로 하고 위반 시는 벌금을 내는 고강도 훈련과 아직 20대 중반의 말랑말랑한 머리 덕분에 몇 개월 안가서 전혀 몰랐던 영어 회화 말문이 터지고 업무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역시 악착같이 해서 안 되는 일이 없구나 하는걸 느꼈고 20대에 배운 외국어라 그런 지 그 후에도 안 잊어먹고 그 많던 해외 업무 시 잘 써먹고 있으며 지금까지 외국인 만나면 영어로 스스럼없이 대화 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30대 중반에 배운 일본어는 10여년 후에 써먹으려할 때 까맣게 잊었다는 것은 배운 시기가 늦어 굳어버린 머리에 메모리가 안 되는 까닭 이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학생 때는 공부할 때이고 돈 벌 때, 연애하고 결혼할 때, 놀 때에 대한 적합한 시기가 다 있는 법으로 바꾸어서 하게 되면 인생이 힘들어진다하는 경험담을 강의 때마다 전달하곤 한다.
특히 대학졸업을 앞둔 젊은이들은 취업과 사회관계에 치중하여 가정의 원만한 안정을 구축 할 때인데 졸업 여행가고, 외롭다고 노인도 아닌데 반려견과 지내고, 게임과 불필요한 만남으로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집중과 선택의 중요한 지금 세상을 향해 전력투구하라고 신신 당부한다.
영어회화 말고도 첫 해외 근무지 얀부 현장에서 1년6개월 의 생활은 기술적으로도 많은 것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고 같이 파견 나온 선배와 동료들과의 돈독한 우정과 달달한 추억은 너무나 많았다 특히 손현구 부장님을 비롯하여 조충연님, 이진홍님, 김윤필님, 김규진님, 김동호,김천식, 박윤기 많은 동료 선후배의 끈끈한 관계는 지금껏 연락을 하며 잊지 못하는 것으로 현장업무도 소통과 화합으로 잘 하였지만 대부분 첫 번째 해외생활 에서의 외로움을 같이 나누었고 힘들 때나 아플 때나 형제같이 서로 도우며 지냈고 그 이외에도 그간 경험하지 못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Yanbu 현장에서 영어를 배우기위해 현지인과 되지도 않는 영어로 들이대기식 대화중
그 첫째로
매일 업무가 끝나고 저녁 식사 후 자유 시간에 갖는 포커 게임, 탁구, 비디오 시청, 기타 오락시설을 활용하여 쉬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Gambling으로 그때 유행하기 시작한 고스톱과 포커게임이 있어 나는 고스톱 보다 포커게임에 푹 빠져 휴일 전날은 밤새 포커를 하여 처음에는 돈을 좀 잃었지만 대체로 눈치도 있는데다 남의 패를 알게 된 후에는 돈 좀 따는 Winner로 현장 가불을 안 해도 될 정도였다.
두 번째로는
쇼핑의 즐거움이다 휴일이면 (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의 휴일은 금요일 ) 삼삼오오 차를 몰고 얀부 시내 다운타운으로 가던지 3시간이상 걸리는 젯다시 까지도 가서 시내구경도하고 토속 음식도 사먹고 시장으로 가서 일본산 가전제품이나 독일제 Grammaphon 음악 테이프, 팔찌, 시계, 가방, 기념품, 영양제 약 등등을 현장 가불과 포커에서 딴 돈으로 샀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은 소니 카셋트 플레이어 Sony-450 과 550 시리즈가 음향도 좋고 스테레오로 나와 귀국 시 꼭 사가는 단골제품이었다.
셋째로는
얀부가 해안 도시로 홍해을 끼고 있어 숙소에서 차타고 30여분만 가면 푸른 홍해 바다에 도착하여 수영도하고 물고기도 잡고 특히 스노우클링하며 신천지 바다 속을 보는 재미가 있어
휴일이면 손꼽아 기다리는 큰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사고가 생겼다 호사다마라고 할까 항상 분에 넘치는 즐거움이나 행복 뒤에는 위험과 불행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또다시 깨달았다
그날도 나와 같이 방을 쓰던 기계공사부 김대리랑 같이 홍해로 가서 스노우클링을 즐기다가 내가 먼저 나와 해변에 있는 소라를 주워 삶고 라면을 끓여놓고 김대리랑 같이 점심을 하려는데 너무 오래 물속에 있는 것 같아 찾아보니 보이지 않아 아이고 사고가 났구나하고 신고하여 몇 일을 미국의 벡텔 직원 다이버도 수색하였으나 끝내 시신도 찾지 못하고 홍해의 난류와 한류가 겹치는 물길에 휩쓸려 큰 바다로 떠내려 간 것 이었다.
실종사건이후 현장 분위기는 침울해지고 홍해 출입 금지령까지 내려 그 뒤로는 한번도 근처에 가지 않았다.
김대리는 나와 친하게 지냈던 룸메이트였고 내가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도 한동안 오래갔고 부질없는 생명의 기구한 운명에 인생 무상한 죽음 무척이나 허탈해했다
죽은 김대리는 결혼도하여 아기도 있고 침대 머리맡 달력에 귀국날짜를 꼽으며 매일 표시하는 홈씨크 였고 유달리 가정적이고 정이 많았다 우연하게도 사고 전날에는 나에게 빌려간 몇 푼의 돈과 한국가요 카세트테이프를 돌려주며 그간 잘 썼다고 인사까지 한 그 모습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또한 사고 후 돌아와 유품을 정리하는데 평소보다 더 잘 깨끗이 정돈되어있는걸 보고 또 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불행한 현장 사건이었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40여년 계속 이어지던 건설 현장에서는 크고 작은 안전사고가 끝이지 않았다 동료도 잃었고 재해를 당한 근로자들도 숱하게 보아왔다
특히 추락 및 낙하 사고가 많았고 차량으로 인한 사고 역시 많았다 사람이 있는 곳은 어디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특히 건설 현장에서는 안전제일 수칙(Safety First)과 위험관리 (Risk Management)를 Manual에 따라 잘 지켜야 하고 건설 인들은 항상 안전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하는 것으로 나의 경우는 후에 내가 경영한 도원 건설 현장에서 안전이 최우선이고 투자도
많이 하여 10여년 동안 큰 안전사고 없이 끝난 것에 지금도 감사해하며
요즘도 지하 술집이나 3층 이상의 장소를 들어갈 때는 꼭 비상구의 위치를 파악하고 다니는 것과 위험한 길 건널 때 사방 주시도 잘하지만 밤 골목길은 피하고 특히 발밑을 주시하여 넘어지지 않게 주위를 살피며 다니는 것이 몸에 배어있다.
작년 전북대에서 위험관리와 위험 대처 (Risk Management & Control )에 대해 강의할 때 국내외 건설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은 일상생활 즉 집안이나 밖에서도 있을 수 있으니 항상 몸에 익혀 안전수칙이 몸에 배어있어야 하는데 애타게도 이글을 쓰고 있는 오늘 뉴스에 강원도 펜션에서 가스보일러연통이 빠져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고등학생 수명의 사상자가 난 안타까운 사건이 보도되고 있다.
관리자든 누구든 육안 점검만 철저히 했어도, 가스 탐지기만 있었어도 이렇듯 단순한 방심이 우리주변에서는 너무도 흔하게 큰 사고로 만들고 있다.
참고로 안전사고 30%는 집안에서 일어나고 상가나 건물 화재 시 비상구를 사전에 숙지하지 못하여 사상자가 더 늘어나는 큰 원인이 됩니다.
네 번째 이야기
행운이자 좋은 일 이었다 그러니까 얀부 현장에 온지 1년이 지난 어느 날 경남기업 중동
본부가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Riyadh 지사에서 현장으로 기계설비 견적할 수 있는 직원 1명을 긴급 지원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그 당시 경남 기업은 사우디아라비아내에서 일어나는 건설공사 수주를 위해 영업 및 견적업무 총괄을 하던 곳으로 많은 인원의 기술자들이 있는데 담만 전신전화국 건설공사 견적이 급해 내가 현장에서 차출되어 리야드 지사 사우디 국내 출장길에 오르게 되었다 .
꼬박 삼일 걸려 비행기타고 다시 자동차타고 리야드 지사에 도착하니 대부분의 일이 끝나 있었고 내가 너무 늦게 도착하여 마지막 복사 및 포장업무만 돕고 온 김에 리야드 시내 구경도하고 다시 현장으로 복귀하려고 Jeddah가는 항공편을 예약하고 기다리는 차에 Damman Post Office Building Project( 약 4000만불 공사) 가 로이스트로 경남 기업으로 낙찰 되었다는 낭보가 터져 지사가 돌연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기뻐하던 중에 서울 본사에서 신기수 경남기업 사장님께서 오신 다고 견적에 참여한 기술자 전원 대기하라고해서 복귀를 늦추고 기다렸다.
사장님이 오실 때 격려차 우리를 위해 술 없는 사우디에 양주 한 박스하고 국내에서 준비해온 족발과 돼지고기 안주까지( 사우디에서는 날씨가 더워 상할까봐 돼지고기가 없음 ) 푸짐하게 차려놓고 수주 축하파티를 하는 끝자락에 나도 앉아 오랜만에 술도 마시고 기분도 최고였다.
신기수 사장님하고 같이 온 유주용 이사 ( 귀국선 노래 가수)가 같이 와 노래도 불러주고 흥이 한창 무르익을 때 기분 좋게 술 취하신 신사장님께서 건배사로 한 말씀하시는데 지사 기술자들의 노고를 치하하시면서 이곳에 있는 모든 직원들 내일 부로 일 계급씩 특진시키라고 지점장에게 즉석에서 지시하시는 것 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업무 끝부분만 조금 참여하고 운 좋게 견적 팀의 일원이 되어 약관 27세의 나이에 과장대리로 진급하게 된 것이다.
경남 기업 내 동기들 중에 제일 나이가 어린 내가 제일먼저 진급하게 되었고 경남그룹 전체에서도 최연소 대리가 되는 행운을 갖게 되어 안부현장을 떠날 때는 사원이 였는데 일주일후
복귀할 때는 과장 대리로 돌아오니 중동에 온지 1년 만에 멋진 환영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고 월급도 많이 올랐다.
이때 받은 월급은 지금 건설업에 종사하는 후배들한테 미안한 마음이나 해외수당 포함하여 보너스 500%를 제외하고 월 60여만 원이라는 거금 이였고 이 당시 3개월 치 월급을 갖고 국내 미아리 쪽으로 가면 집을 한 채 살 수 있는 돈 이었다 ( 그 당시 대졸 초임이 6-7만원 ) 한국의 우리 집안 살림도 좀 나아지고 1년6개월 후 귀국할 때는 13평, 18평 아파트도 사놓고 나름대로 형편이 많이 좋아진 것은 해외 현장 생활에서 땀과 행운으로 얻은 귀중한 자산 이었다.
어릴 적부터 궁핍하고 어려운 생활로 부터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고 이제부터는 행복한 꿈만을 꾸며 큰 기대 속에서도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잘 보내고 1년6개월 만에 무사히 해외 근무를 마치고 가족들한테 나누어줄 선물도 잔뜩 사가지고 부푼 마음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김규진님과 돌아오는 귀국길에 필리핀 마닐라 술집에서 시계를 잃어버리는 헤프닝과 대한항공을 타는데 반기는 여승무원이 얼굴이 작고 그렇게 예쁘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은
한동안 거친 흙먼지 날리는 사막에서 낙타와 압둘라만 보아 눈이 나빠지고 사우디인을 닮아 살도 좀 오르고 숙성되어 완전히 변해버린 윤해균의 모습으로 대한민국 수도 서울로 돌아왔다.
사우디 사막에도 계곡 와디가잇고 산이있어 현지인과 -
얀부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 에서 -1978년-
홍해를 배경으로 한컷- 군대 말년에 단련시킨 몸이라 이때 매우좋았ㅅ-
얀부 현장에서 1978년 - 위 오른쪽 이진홍님,조충연님,나그리고아래 왼쪽부터 박윤기님,김규진님,배기종님
3-3-1 다시 돌아온 인현동 시절
1년 반 해외 근무를 마치고 1979년 봄 한국에 들어오니 집안은 나름대로 전보다 나아진 살림으로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고 내가 실질적인 가장이되어서인지 출국 전까지 시끄러웠던 상황보다 일단은 많이 좋아지고 조용해졌다.
국내 정치적으로는 박정희 대통령 장기집권으로 인한 독재 정권 말기 현상으로 부산 마산을 축으로 데모도 많고 어수선한 가운데 밀어붙이는 경제 개발계획 정책으로 중공업 및 석유화학 공업은 확장되는 시기로 플랜트를 건설하는 회사들은 호황을 누리며 바쁜 시기였다.
경남기업도 플랜트공사와 함께 토목, 건축 공사에 주력하여 덩달아 관계회사인 경남엔지니어링도 바쁜 시기에 배관 기술팀 대리로 합류하여 젊은 28살의 나이로 해외 근무 시 너무 고생한 대가로 나름 청춘의 시간을 보내기도전에 많은 일에 파묻혀 오나가나 일복은 따라다닌다고 할 정도였다.
기억에 남는 굵직한 프로젝트는 내 이력서에도 나타난 아래의 내용이다.
여수 석유화학단지 TDI/TDA Plant, 울산 Alkylbezene Plant, 울산 Union Gas Project 등의 설계 기술용역이 10년 전에는 외국에서 들여왔으나 1970년 전 엔지니어링을 필두로 최 단기일에 국내 순 국산 기술로 자급자족하여 지금은 국내 자체 기술로 기본, 세부 설계용역을 경남 엔지니어링에서 일괄 수행하며 나는 그중 플랜트 배관 설계 기술용역 책임자였다.
바쁘게 시간을 보내면서도 회사 동료들과의 친목활동 및 나름대로 추억의 시간을 보내고 그전에 사귀던 여자 친구의 결혼으로 또 다른 친구의 소개로 젊음의 시간을 만끽하던 그 어느 날
1979년 10월 27일 길거리에 신문사 호외가 뿌려졌다 정확히 어제 박정희 대통령 유고라고
그간 강압 독재로 정권을 이어오더니 측근에 의해 암살 시해 당한 것이다.
책을 많이 읽고 공부해서도 알 수 없는 세상의 이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데
나 역시 세월이 많이 지나 그간의 길지 않은 역사를 보면 대부분 믿었던 주변 사람에 의해
유독 더 힘들어 했던 것 같아 모름지기 주변의 철저한 장치와 관리만이 최선의 방법이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조선의 왕들이 경쟁자에 대한 무자비한 처단과 최근 북한의 김정은의 주변정리를 생각하면 당하느냐 미리 싹을 잘라 버리느냐 잔혹과 지혜의 몫이고 살아 남기위한 자연의 법칙 일부이기도하다.
그간 조국을 위해 많은 일과 발전을 이루었으나 먼 훗날 역사가 이야기 해줄 것이고 이제부터 정치 경제 발전과 시행 사업의 마무리는 살아있는 사람의 몫이고 역사나 인생에도 정답은 없으니 어찌되었든 그 이후 나라의 정치나 경제는 상당히 혼란한 시기를 예고하고 있었다.
1980년대로 들어와서 국내외 호황이던 건설경기가 갑자기 일시적이긴 하나 위축되어 내가 몸담고 있던 경남엔지니어링도 일감이 부족하고 모든 건설회사가 그간 10여년 꾸준히 성장해오다가 국내 역사상 처음으로 건설회사 구조조정에 직면하였다.
나는 그 당시 50여명이나 되는 많은 직원을 거느린 배관 기술부 과장대리 이면서 부서장 대행 업무를 맡고 있던 터라 회사로부터 30% 인원을 감원 시키라는 지시 이행에 고심 하였다.
노조도 없고 경영자가 구상하고 지시하면 따라야 하던 시절이라 할 수없이 군 입대를 앞둔
사원과 나이 많은 경력직 사원 중 이직이 가능한 사람과 일부 결혼할 여직원 순으로 권고사직을 종용하여 퇴직 시키고 나서 나 역시 약속대로 총대매고 사표를 제출하였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조승남 이사님과 임남수 사장님이 극구 반대하고 회사를 같이 지키자고 하였으나 직원들에게 권고사직 종용 시 약속한 책임과 내가 어딘들 갈 수 있는 능력과 젊은 배짱이 있었기에 퇴사 후 얼마간 아르바이트로 건축 설비 설계를 해주고 돈벌이를 하다가 신성건설 해외 건설에 기계 설비 직으로 입사하여 사우디 건설현장으로 두 번째 출국을 하게 되었다.
3-4 두 번째 중동 이야기
첫 번째 출국은 미지의 나라에 대한 설레는 부푼 기대가 있었던 반면 지금 두 번째 출국은 내가 다 알고 있는 열악한 현장과 건조한 사막 조건으로 가기 싫지만 어쩔 수없이 소처럼 끌려가는 상황 이였다.
현장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세 번째 큰 해안 도시인 Jubail로 Damman과 가깝고 사업명칭은 Jubail Administration Building 공사로 다른 현장과 마찬 가지로 공기가 촉박하고 나는 현장 기계 설비 부문 설계와 동시에 현장 공사 관리 감독까지 맡아 잠자는 시간만 빼고는 매일 야근해야만 하는 실정 이었다.
이때 Jubail에서 기억에 남는 일로 옆에 현대건설이 수주한 Jubail Jetty Project 현장이 있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 1년 GDP의 절반에 가까운 12억불짜리 최대 큰 공사현장으로 한번 친구가 있어 놀러갔는데 현장 식당에서 내가 건설 인으로 살면서 가장 존경하는 한국의 건설 위인 정주영 회장님을 만난 것이다 작업복 차림으로 홀로 오시더니 같은 식탁에서 소탈하게 식사 하시며 나에게 회사 옷이 틀리니까 어느 회사 소속이냐고 말을 걸던 소중한 기억이 난다.
휴일도 없이 매일 야근하면서도 틈틈이 시간나면 테니스, 롤러스케이팅, 탁구 등으로 몸 단련을 하며 1년여의 책임 기간을 마치고 무사히 귀국길에 오르며 사우디아라비아에 대고 진저리 치며 각별한 이별인사를 하였다.
다시는 안 오겠다고 다짐하면서 나이가 들었어도 얼마 전까지 악몽을 꾸게 되면 제일 무서운 것이 군대 끌려가는 것이라는 데 나는 중동에 가는 꿈이 더 안 좋은 기억은 한국 떠나 외롭고 할 것이 많지 않아 홀로 지내야 되는 홈시크 이기도 하지만 해외 현장은 항상 저가 수주를 하여 돌관 작업 (정주영 공법 이라고도 하는데 공사기간을 계약서에 나타난 기간보다 당겨서 끝내는 공사로 이윤을 최대로 높일 수 있음) 으로 대체하려한 악습으로 인해 직원이나 근로자들이 너무 많은 일에 혹사당하기 때문이다.
1년이 지나 한국에 들어와 보니 1980년의 건설 불황은 다소 해소되고 충격에서 벗어나 사회도 활발히 돌아가는 1981년 가을 나는 다시 친정인 경남엔지니어링에 재입사하여 종로 2가에있는 삼일빌딩에서 꿈같은 한국에서의 생활이 또다시 시작되었고 옛 동료들과 다시 만난
즐거운 생활에 그간 갖지 못한 회식과 스키, 당구 치며 오랜만에 행복한 시간을 갖다보니
나이도 30살이 되었다 그때 사회에서는 30 전후해서 장가를 가다보니 만혼이라 하여 자연스레 결혼을 생각하던 좋은 시기였다.
두 번의 사우디해외 근무로 아파트도 있고 여러모로 풍족한 상태로 거칠 것 없는 좋은 직장과 열정을 가득 안은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이면서 결혼적령기였고 계절도 때마침 가을 이었고 모든 것이 다 내편 인 듯 절호의 기회로 부푼 미래 설계를 꿈꾸던 어느 날 나에게 가장 극적이고 운명적인 행운의 날이 찾아왔다
유행가 가사처럼 10월의 마지막 날 낙엽 지던 그 숲속에서 나의 신부 ,나의 구세주인 지금의 집사람 초록의 요정을 만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 Jubail 현장에서 1981년
4-1 행운의 웨딩마치
종로의 한 경양식 집에서 처음 마주한 집사람과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 같았다.
지금껏 살면서 주변이나 또는 일기나 내가 쓴 시에서도 말해왔지만 평생의 반려자는 하늘이 정해준다는 말을 믿으며 더하나 의미를 넣는다면 어린 나를 이승에 두고 돌봐 주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가 결혼해서는 착하고 지혜로운 부인 만나라고 점지해주셨다고 믿는 것이다.
또한 내 굴곡지고 어려웠던 인생행로가 결혼 전하고 결혼 후하고 상반되는 극과극의 생활이었기에 결혼은 내게 있어서 크나큰 행운이었고 집사람의 만남은 내 생애 최고의 값진 기회이자 지금껏 행복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10월에 만나 처음부터 우아한 모습과 짧은 머리, 예쁜 얼굴, 차분한 성격까지 내 맘에 쏙 들어 몇 번의 명동 거리 데이트하면서 두 달 만에 전격적으로 청혼을 하게 되었고 처갓집인 춘천으로 가서 처가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어렵게 승낙을 얻어 그해 12월 25일로 결혼식 날을 정하고 일대 승리 쟁취하여 행운의 신혼 출발을 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결혼은 자연적인 순리이며 때에 맞추어 결혼하는 것이 모든 진리에 역행하지 않고 순응 하는 것이라 믿으며 나 역시 충실히 따랐고 두 자녀들도 이러한 부모의 뜻에 따라 적령기에 모두 결혼하여 어여쁜 손주도 보고 지금껏 행복하게 살고 있다.
또한 대학교 강의 때마다 틈만 나면 아래의 결혼예찬을 강의하였고 이정도면 나라에서 상을 받아야하지 않을까 할 정도로 결혼 주선이나 권장은 열성으로 하였다.
행복예식장에서- 주례는 당시 경남 엔지니어링 이문형사장님
결혼 예찬
윤 해 균
나는 종종 젊은이들에게 이야기 한다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 한다 그러나 속히 결혼하여
소중한 가정을 갖고 많은 것을 얻고 나서
조금 후회하는 것이 현명한 세상의 이치이고 남는 비즈니스라고-
결혼 - 철학자들 사랑이야기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반(反)사랑"과 쇠렌 키르케고르(=키에르키고르)의 사랑론(심미적 단계-윤리적 단계-종교적 단계)을 언급하며 철학에서 사랑을 다루는 두 가지 극단점이며 대부분 사랑에 대한 논의가 이 두 가지 사이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또 플라톤을 언급하며 사랑의 보편성과 라캉을 언급하며 섹슈얼리티의 허구성과 필요성이다.
사랑에 드리워진 철학적 개념들에서 우선 낭만적 개념인데, 이것은 만남의 황홀로 집약됩니다. 그 다음으로는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구조-시스템이 견고해지고 개인의 사유를 필요치 아니한다. 모든 건 구조에 대한 문제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사랑 그리고 결혼이 사라진 사회는 황폐할 뿐이다. '사랑은 진리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크리스티안 생제르,
(1943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헝가리 출신 유대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 출신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게 풀어낸 그녀의 결혼 찬가
“결혼이란,
한 쌍의 남녀가 돌아오는 차표도 없이 모험을 떠나는 것이다-
그들은 여행을 떠난다.
천 개의 얼굴 중에 기껏 하나둘,
많아야 세 개쯤 내게 보여줬을 정체불명의 상대와 손을 맞잡고.
길은 점점 험해진다.
찬란한 태양이 모습을 감추고, 그들은 어두운 숲속과 험난한 파도 속을 헤매인다.
어느 날 문득 잠에서 깨어난 그들은 서로를 보며 소스라치게 놀란다.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결혼은 그 무엇으로도 포장될 수 없다. 그래서 생제르는 결혼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결혼을 앞두고 두려움과 설렘을 품은 이에게도,
오랜 결혼 생활로 권태와 고독을 느끼는 이에게도 모두 유용하다.
결혼 -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을 예찬하라!
“사랑하는 그 사람이 당신이 알던 그대로 있으리라 누가 보장하나? 한 시간 후, 한 달 후, 일 년 후, 칠 년 후 그 사람은 어떤 얼굴을 보여줄까? 다른 외투를 입고 다른 모자를 쓴 그 사람을 어느 길모퉁이에서 맞닥뜨리면 알아보기나 할까?”
결혼을 말하는 데는 철학, 도덕, 상식 그 무엇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변함없는 사랑, 영원한 행복도 결혼을 표현하지 못한다.
결혼은 도약과 변화와 거친 파도의 문제이다. 결혼한 남녀 사이에서는 거친 파도가 몰아친다. 끊임없는 부딪침. 그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변화를 체험한다. 과즙과 당밀이 본래의 성질을 잃고 귀한 황금빛 술로 변하는 것처럼.
크리스티안 생제르는 철학이나 도덕 대신 다양한 우화와 신화, 추억 등을 활용하여 결혼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적절한 비유와 시적인 언어로 풀어낸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결혼의 본질을 깨닫게 될 것이다.
결혼 - 선택권을 가진다는 환상은 우스꽝스럽다.
무수히 날아온 꽃가루들 중에 마침 거기 떨어진 하나만 열매를 맺는다. 기적은 ‘거기 떨어졌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미궁 속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으로 만났다는 것이 이미 기적인 것처럼. -이상 책에서 인용된 문구임
4-1-1 나의 결혼식
결혼식 장소는 충무로 대한극장 옆 행복예식장으로 그 당시 서울에서는 종로의 신혼예식장과 함께 제일 좋은 예식장으로 두 손을 꼭 잡고 언약하며 예약을 하였다
신혼집은 안양 석수동에 갖고 있던 아파트에 들어가기로 하고 집사람은 다니던 직장 사표내고 매사 순조롭게 신혼여행 준비까지 마치고 드디어 1981년 12월25일 크리스마스 12시에 성대히 결혼식을 올리고 윤해균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어려서부터 힘들어 하던 일 자라오면서 꿋꿋하게 운 좋게 잘살아 이렇게 성년이 되어 최고의 날에 결혼하게 될 줄이야 정말 마법 같고 꿈같은 결혼식 이었다.
신혼여행은 제주도를 다녀와 석수동에 꿈같은 신혼살림을 시작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간 잠잠하던 집안 불화가 일부 일어나 일말의 고생이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나와 결혼해온 아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같이 고민하고 불행해야하나 참으로 한때는 예상 못하고 결혼한 것에 잠시 나를 자책하였으나 맏이라는 굴레로 많은 것을 양보하고 협상하여 큰 쟁점 없이 불안하나마 하루하루 무사히 보내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같이 슬퍼하고 대처하다보니 요령도 생기고 나름 더불어 사는 체념과 지혜로 버티었다.
늘 따르는 고민으로 우리는 완전 행복하지 못했고 나는 밤늦도록 일도 있었지만 집안의 불화에 화가나 회피용 방황에 늦게 들어오다 보니 아내가 나보다 더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하면 지혜롭게 잘 견디어준 아내에게 지금도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감사한 마음입니다.
석수동 신혼집에서 첫아이 돌때
나름대로 둘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아내의 임신소식을 듣고 또 다른 기쁨과 함께 우리에게도 아기가 생겼다는 환희와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으로 첫아이가 태어났다 아빠와 엄마를 꼭 닮은 첫 딸이었다.
우리부부에게 새로운 행복을 주는 아기의 이름을 윤내영이라 지어주고 매일 일찍 퇴근하여 아기를 봐주고 같이 놀아주고 하루하루 이쁘게 자라나는 아기를 보면 대견하기도하고 뿌듯했던 경험은 지금도 생각나고 백일이지나 재롱도 부리며 웃을 때는 너무도 사랑스러운 우리아기 그래서 첫아기 사랑이 제일 기억에 남고 소중하다.
유모차에 태워 사진도 찍고 동네도 다니고 집안에서는 침대를 붙잡고 깔깔 웃는 모습 보며 무척이나 행복하던 나날이었다.
첫손주가 딸이라고 서운해 하시며 다음은 꼭 아들을 낳으라고 다그치시며 여러 번 불안하게 지내시던 아버님께서 회갑 잔치 몇 달을 남긴 9월초 여행 중에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하신
며칠 후 비명으로 고인이 되셨다.
참으로 많은 상념에 빠져 생각하니 불우하기도하고 한 많은 아버님의 일생을 다시 생각하며 추모하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1922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할아버지 없이 9남매의 넷째 아들로 어려운 생활고 속에 사시다가 서대문 세검정 우리 어머님을 만나 전격적으로 결혼하시고 나와 누님을 낳으시고 그 후 여러 번의 재혼으로 오남매의 집안을 꾸리시며 만주로 혹은 전국을 무대로 풍운아 바람처럼 역경의 세월을 사시다가 너무 일찍 떠나신 불쌍한 영혼을 가지신 아버님.
한동안 원망도 많았지만 삼가 추모 드리며 부족하고 못다 한 효도에 대해 지금도 진심 반성하며 새삼 부끄러울 뿐입니다.
4. 행복한 시절 이야기
4-1 친구 따라 과천으로 이사 가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안양 석수동에 신혼을 지낸지 2년이 채 안되었을 때 새로
조성 된지 얼마 되지 않은 과천 신도시로 이사 가게 된 이유가 친한 친구 3명이 안양과 가까운 과천에 살면서 부르게 된 이유였다 같이 경남 엔지니어링 회사에 다니는 동료이자 친한 친구인 김동호, 김기열, 김윤필씨 가있어 그 옆집으로 이사 갔고 또 다시 새로운 신혼생활이 친구들과 함께 행복하게 이어졌다.
특히 나이도 같은데다가 같은 시기에 결혼도하여 집사람들끼리도 친하게 지내어 거의 매일 만나고 각자 집을 돌아가면서 방문하여 진한 우정도 나누고 거의 매번 술 파티를 하다시피 하던 아주 즐거운 생활로 평생 쏜 꼽을 정도의 제일 행복한 시기로 지금도 잊지 못한다.
회사는 양재동 말죽거리 사거리에 있어서 과천에서 버스타고 출 퇴근 하기가 아주 좋았고 뱅뱅 사거리에 있던 학사 당구장에 자주 들리고 그 옆에 치킨 집에서 직원의 해외 전출입시 송별 회식하던 모델 하우스 옆 삼겹살집이나 “뿌리“라는 2차 맥주 집에서 갖은 숱한 밤 문화 지금도 눈에 선하고 마냥 즐거운 젊은 한때였다.
회사 주변은 건물도 얼마 없고 허허 벌판도 많아 월급도 모으고 스키타거나 당구 치던 돈을 모아 말죽거리에 땅 좀 사놓았다면 지금 큰 부자가 되었을 터인데 요즘도 그곳을 지나면 이러한 아쉬움과 가끔 술자리에서도 농담으로 던지는 말이 되어 무엇이 맞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일생을 살면서 땅도 사고 아파트도 여러 번 사다 팔았다 하였고 기회도 많이 있었지만 부동산 으로 큰 재미는 보지 못한 것 같아 체질적으로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가 나에게는 투자의 유전인자도 없고 안 맞는 것 같다.
결혼 전 소형이나마 아파트 3채와 주식 그리고 춘천 , 경기광주, 판교 땅과 빌딩 한때는 갖고 있었으나 내 것이 아니었다 끝까지 갖고 갈수도 없고 한때 내 소유로 기분 상 만족만 했지 만질 수도 필요할 때 쓸 수도 없는 물거품 같은 부귀의 꿈도 꾸고 많이도 갖고 있다가 도원 그룹의 청산시점에 실제 몇 개월 사이에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다 내려놓고 그렇다고 큰 아쉬움 없이 보내버리고 담담하게 살고 있는 지금 옛것의 잃어버린 것에 달관한 내가 이상하리만치 바보스러운 행복 운운 뒤에 엇뜻 진실이보이고 풋풋한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새삼 정철스님의 말씀 중 “진정한 행복이란 소박함에서 이루어 진다”라는 무소유의 털털한 일탈이 생각난다.
이제는 과거로 갈수 없는 일 부자가 되기보다 더 귀중한 사랑과 우정 그보다 더한 건강한 몸과 건전한 정신 속에 항상 꿈틀대는 욕망 덩어리가 있고 그리고 밤마다 뒤적이는 추억 앨범 같은 젊음의 향연과 경험을 갖은것만으로도 진실로 행복하다.
회사 일로는 국내에 천연가스가 도입되던 시기로 국내 최초로 평택 LNG인수기지 건설공사 설계를 하면서 석유화학 플랜트와 천연 GAS관로 공사도 한창이라 플랜트 설계업무를 열심히 하였지만 스키나 테니스 운동도 같이하며 남부럽지 않게 다양하게 젊음을 즐기며 살던 때였다.
이때 KBS에서 남북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어서 TV만 틀면 배경 노래로 이미자의 “누가 이 사람을 모르 시나요”음악이 깔리고 매번 티브이만 켜면 울음바다가 된 상봉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며 슬픈 역사로는 전두환 대통령 버마 순방길에 북한의 아웅산 테러로 아까운 각료 여러 명이 순직한 사건으로 1983년 10월 9일에 미얀마의 수도 양곤에 위치한 아웅 산 묘역에서 미리 설치된 폭탄이 터져 한국인 17명과 미얀마인 4명 등 21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 무력부 정찰국의 폭탄 테러 사건이다.
대한민국의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등 각료와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기타 수행원들이 부상당하였다 이때 순직하신 서석준 부총리이하 모든 분들이 한국의 우수한 인재였고 훌륭하신 분들로 안타갑기 그지없는 사건으로 대한민국의 인재 절반을 잃은 슬픈 날이기도 하다.
2012년부터 3년간 상도동에 산 적이 있어 매주 국립묘지 현충원으로 운동하러 간적이 있는데 장군묘역 앞에 아웅산에서 순직한 분들의 묘소가 있어 볼 때 마다 추모하며 아쉬워하던 기억이 난다.
곧이어 교황 바오로2세 방한, 86 아시안 게임 개최 등으로 나라의 위상이 드높아 질 때였다
1970년 중반에 중동 건설과 국내 중화학과 발전, 중공업 분야의 눈부신 발전으로 건설시장이활성화 되고 설계회사도 많이 생기고 건설 관련 회사의 이상 과열로 1980년에 이어 또 한 번의 구조조정으로 이합집산이 시작이 되고 경남 엔지니어링도 1984년을 못 넘기고 대우 엔지니어링에 흡수 합병이 되어 대부분의 동료들이 다시 여의도에 있는 옛 전엔지니어링 건물로 원하지 않게 회사를 옮겼다.
이때 선배 친구임 김윤필씨는 선경건설로 사우디 해외현장으로 가서 몇 달 만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회사 동료였던 부인과 아이 둘을 남기고 안타깝게 젊은 나이에 순직하여 남은 친구 김기열과 김동호하고 같이 한동안 슬퍼하며 못 견디게 그리워하다가 2년도 채 안되어 아름다웠고 추억이 가득한 과천과 말죽거리 시대를 마감하는 시기가 되었다.
나의경우도 동료들과 비슷한 입장으로 흡수당하는 입장에서 신변에 손해를 보는 것도 있지만 쓸데없는 자존심과 근무 여건이 자유롭지 못한 관계로 오래 버틸 수가 없어 다른 회사를 알아보는데 여의치 않아 내가 가진 해외경력을 살려 한 번 더 해외현장을 겨냥하여 이번에는 현장 소장이라는 책임자로 신성건설에 다시 도전하여 마지막으로 해외를 나가게 되었다.
이번 해외 근무 선택은 오로지 나와 집사람과 아이의 가정을 위한 큰 그림의 계획으로 경제적인 측면의 고려가 가장 컸다 출국하기 전 과천에서 나와 집사람과 3살 된 첫아이는 친정인 춘천으로 가게하고 퇴직금 등을 모아 춘천에 땅 일부와 대우 포일리에 있는 2층짜리 아파트를 구입하고 배수의 진을 친 다음에 비장한 각오로 1984년 말경 2년6개월이라는 건설기간과 공정도 한결 어려운 공사 현장에 기계설비 건설 현장소장으로 출국하게 되었다.
경남 입사동기이자 영원한 친구 김기열과 과천에서 원샷
전 엔지니어링에서 경남으로 같이온 절친 동료 김윤필님과 배기종님과 한탄강 에서
4-2 세 번째 중동이야기
사랑하는 집사람과 토끼같이 어여쁜 아이를 떼어놓고 또다시 사우디로 향해야만 하는 기구한 운명, 젊음 시대의 의무와도 같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된 자의 세 번째 해외 현장 근무 이번은 지난 두 번의 해외 현장과는 달리 이번 경우는 사우디 남부 예맨 국경근처의 오지 산악지대에 위치한 AL-BAHA 작은 도시에 건설하는 스포츠 센터로 기계설비 공사 부문을 한국에서 내가 직접 견적하여 자청해서 현장 총괄 책임자인 현장소장으로 간다는 것이고 공사기간이 2년6개월이나 되는 어려운 환경의 공사현장 이었다.
30여명이나 되는 설비, 배관, 닥트, 용접 기능공들과 십장, 반장 각1명을 구성하여 데리고 2박 3일이나 걸려 현장으로 가서 그간 2번의 사우디경험과 10년에 가까운 경력과 33살이라는 젊은 혈기로 무엇이든지 다 이룰 수 있다는 자신만을 가지고 가서 그간 겪지 못했던 예상치 못한 수많은 고초와 난관을 겪게된다.
사우디 북부 산악지대에 위치한 AL-BAHA Sports Center 건설공사
스포츠 센터 6층 건물과 각종 경기시설 그리고 축구경기 스타디움 설비공사로 발주처는 사우디 정부 알바하 시청이고 감독은 영국의 Macdonald Fac. 회사로 내 파트너 감독은 R. Smith로 까다롭고 악명이 높은 게이 같은 놈으로 나와 한국회사를 무수히도 괴롭혔다.
끝날 때는 결국 웃으며 잘 끝났지만 내가 겪은 고생과 공사 내내 반복된 수정과 과도한 지적으로 인한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AL BAHA Sports 현장의 악명 높고 까다로운
영국 Cooper Macdonald의 기계감독 R.Smith와 함께
우선은 어느 현장이나 마찬 가지로 돌관 작업을 해야 하고 산악 지대이다 보니 숙소와 현장이 멀고 여건이 안 좋아 공사가 초기에는 지지 부진 하였다.
매일 휴일도 없이 새벽 5시에 일어나 5시 반에 조회하고 6시부터 작업 시작하여 저녁 먹고 또 야근까지 불사하였고 그 당시 대부분의 해외 현장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해외 근로자 분들은 항상 이렇게 일을 하여 현지인들이나 영국, 일본 회사 직원들이 밤에 불 밝히고 공사하는 우리 한국회사를 보고 놀라는 모습을 많이 들었다.
나는 그렇지 않아도 잠이 많은데 여기서는 항상 잠이 모자라 아침 기상이 매우 힘들었고
반복되는 현장 설계 변경과 내가 기계설비 공사 현장 책임자라 타 공정인 건축하고 토목이 많이 부딪혀 언쟁이 잦았고 특히 공사 초창기에는 기능공들이 야근 수당 추가요구나 처우개선 요구로 스트라이크가 나면 내가 해결하여 현지 조달하든가 내가 직접 용접공 대신 용접하다가 얼굴에 화상을 입은 적도 있고 하루도 바람 잘날 없는 위험한 현장과의 전쟁 이였다.
처음부터 정공법으로 타협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다가 시비도 붙고 불만 있는 기능공은 쫒겨 가는 날 내가자는 방에 돌은 던지지를 않나 내사무실 책상위에 도끼자국을 내고 협박했으나 나는 굴하지 않고 원칙을 고수하여 끝가지 현장을 안정되고 일괄되게 운영하여 마칠 수가 있었다 이때 얻은 경험으로 지금껏 건설현장은 규정 틀 내에서 정면 돌파만이 현장의 생명인 3대 원칙인 품질관리, 공기준수, 안전관리를 지킬 수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꾸준히 생명같이 지키고 실천하였다.
초기에 너무 힘들어 자청해서 괜히 왔나싶어 후회도하였지만 현장 책임자입장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아내와 아이들 보기에도 2년 반은 채워 성공하고 돌아가겠다고 참고 지내던 중 죽으라는 법 없이 하늘이 공평 하다는 만고의 진리가 나를 살렸다.
1985년3월 한국에 계신 장모님으로부터 집사람이 무사히 둘째를 순산하였고 아들이라는
최고의 소식을 듣고 난생 처음으로 뛸 듯이 기뻐하고 힘든 나날에 큰 위안과 힘이 되었고
무사히 끝까지 건설 공정의 모든 것을 공기 내에 마치고 성공적인 현장 결산이 된 동기부여의 확실한 계기였다.
사실 출국 전에 임신 사실을 알았고 첫딸을 낳고나서 유난히도 아들을 절실히 바랐지만 말도 못하고 하늘의 결정에 따르기로 하고 노심초사 기다린지 10개월 만에 듣는 천상의 낭보소리
우와 나도 귀한 나와 꼭 닮은 아들을 얻었고 우리 집 장손으로 대가 끊어지지도 않고 이렇게 기쁠 수가 아내한테 수도 없이 감사해 하며 그간의 피로가 싹 풀리고 기운이 백배하여 그날 식당 재료 넣는 현지 업자를 통해 조니워커 위스키 6병들이 한 박스와 양고기 파티를 주문하여 신성 직원과 우리 은성 직원과 같이 아들 탄생 축하주를 기분 좋게 그것도 크게 쐈다
세상의 이치에서 힘들게 일하며 견디다 보면 이렇게 좋은 일도 생기는 것을 보니 모든 세상의 모든 일은 세옹지마 인 것이다.
이름은 고심 끝에 아들인지 딸인지 몰라 ( 그 당시에는 초음파로 성별을 미리 알 수 없었음 ) 중성적인 이름 윤민영과 윤호영 으로 지어 놓았는데 아내가 출생 신고하면서 윤호영 이름으로 드디어 나의호적에 올렸다 그렇다 나의 아들 천하의 윤호영으로 ,
현장에서 에피소드는 많이 있었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기억은 없는데 우선 기계공사 Inspector가 영국인인 토니라는 노인인데 나하고 워낙 친해 기계감독 R.Smith하고의 불화를 중재하고 우리 편에서 많은 도움도주고 저녁에 피곤하여도 공사 후반기에 가서는 라이트 켜놓고 테니스경기를 많이 하였고 헤리스라는 건축 감독은 술 먹고 나와 언쟁이 붙은 이유는 한국인을 비하하는 행동으로 내가 술병을 바닥으로 내리쳐 깨고 한국말로 욕을 하니까 ( 원래 건설현장에서는 수준급 욕을 많이 하여 심한 언쟁에서 싸움까지 안가고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도나 소리가 크고 세다 )그 뒤로 나를 피하면서 교활하게 현장에서 감독의 권한으로 애를 많이 먹여 한동안 고역을 치른 적이 있었다.
또한 잊지 못할 것은 두 번에 걸친 일생일대의 대형 사고였는데 운 좋게 피하여 죽지 않고 살아난 경험이다.
첫 번째로 현장과 숙소가 산악 도로로 연결되어 비탈길이 많은 데 이곳은 겨울철 비가 가끔 오는 날 운전하며 내려가면서 습관적으로 급브레이크를 밟은 후 차가 360도 회전 후 도랑으로 빠져서 굴러 떨어질 번하다 퉁겨 져 나왔는데 한군데도 다친 곳이 없고 차만 큰 손상을 입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경험과,
두 번째로는 대낮에 선 그라스를 끼고 현장 점검을 하던 중 6층 에레베이터 홀 PIT 공사장 시찰을 할 때 환한 태양 빛이 있는 밖에서 갑자기 실내로 들어오니 컴컴하여 더듬고 피트 쪽으로 가면서 작업자를 찾았으나 없어서 돌아서 기다리는데 주위가 점점 밝아지면서 발밑을 보니 20여M 낭떠러지 피트 바로 옆에 내가 서 있는게 아닌가 모골이 갑자기 송연하니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나 반발만 더 움직였으면 황천길로 바로 갔을 터인데 역시 나는 하늘에 계신 어머니 수호신이 계셔서 나를 불쌍히 여겨 이 머나먼 사우디에서도 보살펴 주시는 구나하고 또다시 믿고 기도하며 그날 이후로 현장일 모든 안전과 운전에 지금도 최우선 원칙으로 삼으며 생활 안전, 현장 안전 어디서나 주변을 살피며 위험에 대비하고 더 철저히 지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 하나의 즐거운 기억은 떨어져 있던 아내와의 연애방식이다 우리는 만난 지 3달 만에 결혼하였고 신혼 때 집안일로 시끄러워 제대로 된 추억도 갖지 못하고 첫애를 낳아 과천에서 그나마 2년 정도의 행복한 신혼 생활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가 갑자기 멀리 떨어져 지내다보니 무척 그리워지면서 사무치게 보고 싶은 마음에 난생 처음으로 연애편지 쓰는 것으로 대신하며 달래는 즐거움이다.
그때는 현장에 전화도 없고 시내 우체국으로 두 시간은 가야 한 달에 한번 통화 하는게 고작이었다.
일주일에 한번 씩 편지를 주고받는 재미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가 일기도 쓰고 시 작품도 수시로 써서 보내면 아내는 체질적으로 글쓰기 힘들었을 텐데도 나를 위해 꼭 답장을 주고 아이들 사진도 보내주었고 오로지 편지 오기만 기다리고 읽는 것이 그곳에서 최고의 낙이었다.
지금도 3년 동안 주고받은 수 백 통이나 되는 편지들 잘 보관하고 있어 후에 중동의 나의 사랑 에세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만들 예정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하염없는 성원과 아이들을 생각하며 열심히 일한결과는 현장에서 완벽한 결과로 나타났다 공사기간도 2개월이나 단축 하였고, 실행도 예상보다 이윤이 많이 나서 좋았고 공사 품질도 끝에 가서는 영국 감독이 나에 대해 감사하며 칭찬과 함께 모든 건설 평가가 합격했다는 통보를 해왔고 시운전과 상업 운전도 완벽하게 끝났다.
특히 중요한 것은 안전사고를 한건도 발생하지 않은 유일한 현장으로 기록되어 지금도 나는 그때일로 큰 자부심을 갖고 있고 그 이후부터는 모든 일에 자신을 가졌으며 약관의 젊은 33세 나이에 갖은 2년 6개월간의 현장소장이라는 큰 경험과 피와 땀으로 일으킨 성공이 나를 새롭고 강하게 키웠고 후에 국내에 들어가 입사한 동아 엔지니어링에서의 눈부신 활약과 도원 그룹을 창업하여 년1200억 매출의 중견 기업을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빛나는 귀향길 돈도 많이 벌었지만 죽을 고비에서 살아남아 큰일을 훌륭히 완수하고 2년 반 만에 완전히 새로운 사람, 새로운 전사, 강한 윤해균 으로 변신하여 이제는 다시는 사우디에 오지 않겠다고 되 뇌이며 화려한 귀국 길에 올라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는 한국으로 고고--
개선장군이 되어 1987년 2월 서울에 도착하여 신성건설 회사와의 현장 결산과 정산을 마치고 나니 내가 귀국했다는 것을 알고 몇몇 회사에서 나에게 스카웃 제의가 왔다.
그간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내 평판과 역량 그리고 12년의 플랜트 엔지니어링과 건설 경험을 중히 여기고 다행히 많이 소개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SK 건설과 동아건설 /엔지니어링에서 입사 통고가 와서 그중 동아엔지니어링 플랜트설계 기계 과장으로 연봉도 많이 책정된 좋은 조건의 입사였다
집은 춘천에서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사우디 가기 전에 사두었던 지금의 평촌 포일리에 있는 대우 전원주택으로 이사하여 제2의 신혼생활을 시작 하였다.
결혼 후 처음으로 우리 네 가족은 완전 일체가 되어 그림 같은 집에서 (실제 2층집으로 잔디밭도 있는 전원주택 같은 아파트였음 ) 너무도 행복한 생활의 시작은 그간 내가 어릴 때부터 겪었던 불행과 사회에 나와 불굴의 노력으로 얻은 지금의 환경과 조건에 비하여 너무 큰 보상이고 뿌듯해하면서도 감사한마음에 아내와 같이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갔다
사랑하는 아내와 유치원 다니는 첫딸 내영이 천사 같은 세 살 된 아들 호영이 부러움 하나 없는 완전한 윤해균 집안의 완성 체였고 내 일생에서 베스트 오브 베스트에 들어가는 행복한 세월 이였다.
더군다나 제일 친한 친구인 김기열이 바로 옆집에 살고 있어 좋을 때나 슬플 때나 축하와 위로가 되고 휴일이면 우리 집 잔디마당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며 술잔도 나누고 우정을 나누며 하루하루 꿈같은 시간을 원 없이 만끽하였다
이당시 국내 뉴스로는 노태우 대통령 취임과 북한 공작원 김현희 KAL기 폭파사건으로 시끄러웠고 특히 88년 서울 올림픽 준비로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혁신적인 국가로 새롭게 변신을 하는 변환기이기도 하였다.
나도 이때쯤 처음으로 현대 스텔라 자가용을 구입하여 아이들 태우고 춘천으로 가까운 명승지로 다니며 원 없이 즐기며 사는 풍족한 생활 이였다.
눈 오는 날 걸어서 친구 김기열 ( 일명 물새 아니면 신림동 김 ) 집에 가서 밤새 술과 함께 지난 이야기에, 길옆에 투다리 에서 친구와의 회식, 아이들 데리고 동물원이 있는 서울대공원에 자주 가고 시간이 날 때마다 친구들과 교외로 무척이나 잘 놀았던 같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행복과 불행의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고 무한대도 절대 아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 비비안리 처럼 옆에 진실로 사랑하는 멋있는 남편 케이블을 잊어버리고 엉뚱한 허상인 친구 남편 레슬리 허수아비를 사모하다 가정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지?
아니면 행복이라는 것을 잊고 허상을 쫒아가는 변화가 필요한 시기였을지도 모를 반항적이고 방랑기질이 슬슬 피어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는 많은 고민도 하지 않고 홀린 듯 한국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전 가족이 이미 가기로 하고 상당히 많은 부분을 진행 시키다가 시간과 에너지만 잔뜩 소모하고 집사람한테 처음으로 신뢰를 저버리는 핀잔을 듣고서야 미국 이민 가는 것을 전면 포기한 사건이다.
만약에 그때 미국으로 갔으면 어찌되었을까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았을까?
잘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한 가지 있다.
현재인데 지금 우리 가족과 같이 살면서 지난날 절대 그리워하거나 후회하지 않고 잘살았다 하면서 지금 오늘이 즐겁고 더 행복한 날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사를 해야 하는 경우가 되었고 마침내는 서울 쌍문동 또 다른 친구 김동호가
살고 있는 곳으로 찜찜한 마음을 안고 이사를 가게 되었다.
굳이 잘못한 내가 할 말이나 혹은 이유를 이야기 하라면
“구르는 돌에 이끼가 안 낀다” 라는 미국 속담뿐이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오랜 시간도 아닌데 변화 없이 좋은 시절 잘 보내면 되는 것을,
지금에 와서도 이해가 안 되는 나의 대책 없는 방황과 이상의 추구 그리고 성격도 급하고 깊이 생각도 안하고 덜컥 결정하는 행동도 후회 한다.
무언가 한곳에 꽂히면 헤어나지 못하고 결정적 실수를 저지르고 마는,
좋게는 창의적이고 머리의 회전이 빠르고 좋다지만 나쁘게는 독선적이고 고집이세고 남의 말을 절대 경청하지 않고 우유부단한 행동과 실행의 과오들을
그때나 지금도 늘 반성만 한다는 것이다.
그 당시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을 그때 읽었더라면 내 인생은 크게 달라졌을까?
라고 생각해보며 그 누구를 위하여 주요부문을 아래와 같이 발췌해 보았다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지은이 : 클레이튼 M 크리스텐슨
정답이란 없다..실패가 나중에는 성공으로 이어지는 우연 아닌 우연...
이러한 불특정한 일상 속에서 어떻게 정답을 찾아 갈 것인가?
과연 정답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나는 인생의 정답은 없다고 본다
결국 자기 자신의 인생의 평가는 본인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은 뒤 후세에서
내리는 것이 아닐까한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참된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이 세상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각자 다르지만 우리의 최종 목표는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잘 관리해서 모두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이론으로 인생을 중간 평가해보고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든든히 마쳤다면 크리스텐슨 교수의 마지막 당부에 귀 기울여라. “원래 변화하는 건 힘들다. 알고 있는 것, 해오고 있는 것을 그냥 고수하는 게 더 쉽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면 다양한 기회를 실험하고, 방향을 선회하고, 전략을 유연하게 수정해나가라.”
사우디 ALBAHA 건설현장 스포츠센처 신축 건물앞에서 -1985년경
사우디 영국 감독 헤리스와 오아시스에서 한판승 -1985년
ALBAHA건설 현장소장 시절 -1984년
첫아이 내영이와 댄스로 즐거운 한때 1987년 포일리 대우아파트에서
행복한 시절 과천 어린이공원 봄나들이 -1988년
4-3 동아 엔지니어링에서 10년을 보내다
1987년 봄 서소문에 있는 동아건설 본사 앞에 대한통운 빌딩 7층과 8층이 동아엔지니어링 본사였다. 직원도 200여명정도의 국내 플랜트 엔지니어링 회사 중 순위 10위권에 간신히 들어가는 중견 종합 엔지니어링 회사에 추천을 받아 경력직 과장으로 입사하였다.
동아 엔지니어링은 주로 발전 플랜트 설계로 일산, 일도 열병합 발전소, 서해 화력 발전소, 울진 원자력 발전소, 리비아 사리르 발전소 등을 많이 설계하고 동아건설에서 나오는 통신과 토목, 건축설계 일을 도맡아하는 동아건설의 계열사였다.
나는 플랜트 사업본부의 배관과장으로 들어가자마자 반월 열병합 발전소 PE 사업관리자 ( Project Engineer )로 배관 설계 책임자와 기술용역 사업 관리 업무까지 맡아 첫날부터 야근을 하여야만 했다.
1987년도에는 섬머 타임까지 국내 최초로 시행되어 저녁 8시에도 훤한 날씨 덕에 더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일하는 계기가 되어 나는 오나가나 일복이 터져 은퇴 할 때까지 이어져서 한때는 주어진 팔자라고도 생각했다.
이때 서소문에서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입사하자마자 사무실 분위기가 살벌하고 파벌도 심하고 모함에 폭력 사태까지 발생하여 제대로 일할 수 있는 기본이 되어있는 조직이 아니어서 놀랐지만 산전수전 공사 현장 소장까지 겪은 나에게는 별것 아니었고 열악한 환경과 조건바탕 관계없이 조화롭게 긍정의 마인드로 조직에서 강약을 조정하며 부딧치면서 더 열심히 하는 동기 부여가 되었다.
또 하나는 88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직선제 개헌을 위한 데모가 서소문에서 광화문까지 연일 이어졌는데 나도 회사 동료와 함께 넥타이 부대의 일원으로 시가행진에 참여하여 민주화에 일조를 하였고 그 영향으로 노태우 후보가 직선제 수락 연설도하여 선거를 하였으나 시시각각 민생과 민주화를 향한 시위가 시청 앞과 회사주변인 서소문 일대에서 수시로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은 생각지도 못할 것이 사무실 책상위에 재떨이가 있어 근무 중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워도 되고 아침 출근 전에는 여직원들이 일찍 나와 재떨이도 비우고 수동 버튼 식 전화기를 걸레로 청소한 후에야 근무를 하는데 타자기는 GE미국의 볼타자기를 사용하여 한자라도 잘못 치면 처음부터 다시 쳐야만 했던 기억이 그립고 아련하다.
내가 맡은 반월 열 병합발전소 설계 Project는 우여곡절 끝에 아니 나의 경험과 그간 쌓은 10여년의 노하우와 필사적인 피와 땀으로 2년여에 걸친 기술용역이 성공적으로 간신히 마무리하였다.
이때 내가 수행한 엔지니어링 기술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PMS ( Piping Material Specification )라고 발전소에 들어가는 배관자재 사양서와 지하배관 설계도면의 하나인 Plan & Profile을 직접 창의하여 작성한 것이 지금생각해도 큰일이었다.
Project가 끝나 차장으로 진급하고 배관기술부 부서장직을 수행하면서 영업을 같이하여 처음으로 회사 소속이지만 직영형태인 배관 사업부로 불리며 독립채산 형태의 사업본부 체재로 중소규모의 사장이나 마찬가지였다.
50여명이나 되는 부서원을 데리고 기술관리 인사관리는 물론 수주를 직접하고 실행관리를 하여 매월 수지 분석하여 회사에 이윤을 남기고 평가하여 부서간의 경쟁이 치열하였다.
내가 맡은 배관사업부에서의 영업이 나의 천직인양 적성에도 맞고 선천적으로 사교적인데다 운동과 각종 취미 활동을 다 잘하면서 술을 먹어도 많이 취하지 않고 정신과 매너 덕분에 일도 잘 풀리고 퇴근 후 술 먹고 와도 더 온순하고 치밀하여 술로 인해 몸에 전혀 부담도 없고 집사람도 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일절 잔소리가 없다.
도리어 친구들 모임에서는 술 먹고 난후의 나의 깔끔한 모습과 귀가 시 우산 한번 잊어버린 적도 없고 들어와서 옷 정리 하고 씻는 완벽한 습관을 칭찬까지 하며 지금도 아내는 언제든 술상 차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술을 좋아하고 가까이 하면서도 속편한 노년이 된 것은 아버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술 체질이기도 하고 어릴 때 많이 보아온 술 취한 아버님 모습의 일탈 행동에 따른 고통과 괴로운 트라우마를 갖고 자라면서 절대 나는 저런 모습 보이지 않겠다는 슬픈 약속과 절규의 산물이어서 씁쓸하나마 그래도 단하나 물려주신 쓸모 있는 지금의 유산이 되어버렸다.
그러기 때문에 아직껏 술 먹고 실수한번 한 적이 없어 영업의 시작과 끝마무리 까지 완벽하게 수행하여 한국 수주 밤 문화를 이해하고 섭렵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고 지금도 글을 쓰면서도 나이에 비해 술도 자주 먹고 주량도 친구들 보다 많이 즐겁게 마시는 편이다.
수주도 잘되고 부서관리도 15년 실무를 바탕으로 운영하여 10여개 사업부중 항상 최우수부서로 성과를 내고 나 역시 이때 수행한 매달 기성과 인건비 등 지출을 정산하는 독립채산 식 사업부 경영덕분에 학습 효과가 있어서 훗날 도원 건설 그룹을 설립하고 운영하는데 큰 보탬이 되었다.
이때 생각나는 큰 사업 건으로는 일본 요꼬하마에 있는 Sanko Engineering과의 협력 사업인데 1989년부터 일본에서 기술용역 건을 영업하기위해 서울시청 앞 대한일보 3층에 있는 일본어학원을 3개월간 다니며 일본어 공부를한다음 일본으로 건너가 지요다의 석유화학 배관 설계 기술용역을 운도 좋았지만 입찰 자료 준비도 많이 하고 인맥을 최대로 활용하여 결과적으로 150만 불 ( 약17억 ) 수주하여 단독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이당시 설계용역으로는 꽤 큰 금액이고 내가 직접 산꼬 임직원들 앞에서 일본어로 PT (사업설명 및 회사소개 Presentation of Company Pre-Qualification )를 유창하게 하였고 저녁 술자리를 마련하여 일본 발주처의 신뢰와 로비를 잘한 덕에 2-3년간 많은 일을 한국 유일의 협력사로 자리매김하여 외화획득과 국내 일자리 창출 ( 하루 동원 인원이 협력사 포함 120명 정도로 회사에 자리가 없어 동아건설 서소문 본사 2층을 모두 빌려서 70여명을 모아놓고 수행하였음 )도 하고 일본 출장만 여러 번 다녔고 한국직원도 일본 산꼬 본사에 많이 파견하였다.
일본 방문시 Sanko 엔지니어링 직원과 왼쪽 부터 김한필 부장님, 심희삼 상무님, 아오끼상과 함께
여기서 모든 기업이 특히 건설은 수주 산업이다 보니 건설 영업 전략이 전체 비즈니스 세계에서 자동차 판매 세일즈 다음으로 어렵고 비중도 크고 많은 전략이 필요하다.
기술협의, 미팅, 회사소개, 고객 방문, 고객관리, 견적서 작성 제출, 계약협의, 금액 네고 (Nego) 및 조정, 식사와 음주문화, 골프회동 등 많은 영업활동이 있으나 그중의 가장 중요한 스텝과 전략은 수주하려는 사업에 대한 고도로 훈련된 프레젠테이션이다. 그래서 이기는 프레젠테이션 전략과 디자인을 잠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수주 성공률 95%의 신화 핵심 노하우
‘경쟁 프레젠테이션’에서 이겨야 하는 운명을 지닌 승부사로 입찰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제안서 작성의 비결은 경쟁 프레젠테이션에서 이기기 위해 필요한 모든 분야의 핵심적인 정보를 와 컨설턴트, 프레젠테이션 코치, 그래픽 디자인 컨설턴트 모두가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거나 리허설 할 때 제안 프레젠테이션에서 이기기 위해 반드시 준비하고 알아야 할 것들이다.
입찰 제안이 전 산업 분야의 공식적 구매 프로세스로 확대되면서 제안 프레젠테이션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또한 우수한 인재의 기준을 평가하는 지표로 발표 능력과 제안 역량이 요구되면서 프레젠테이션 능력 또한 모든 사업가나 비즈니스맨이 가져야 할 필수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제안 프레젠테이션은 일반적인 발표 역량과 달리 설명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주 및 판매를 위한 설득이 더욱 더 중요하다.
오늘날 기술 제안 프레젠테이션이 중요해진 이유도 제품과 서비스 자체만으로는 차별화하기가 쉽지 않아진 현실에서 고객의 높아진 눈높이를 맞춰줄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의 효용을 구체적으로 설득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신뢰할 수 있는 솔루션 제공자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알려야 하기 때문으로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발표자의 역량과 신뢰성
2. 기술 제안의 차별화와 첨단 기술 확보
3. 고객의 요구에 맞는 차별화된 체계 설명
4. 경제성, 안정성, 효율성도 부각하지만 디자인 측면을 추가로 환경에 삽입
5. 정확한 의사전달과 질의응답 소통
6. 3D 혹은 영상 구현으로 화려한 시스템 도입 ( 건설은 BIM 프로그램도 사용 )
6, 스마트한 진행 시간준수 서포터즈 활용과 끝맺음 인사말을 준비.
제안 프레젠테이션에서 이기는 방법은 사실 매우 단순하다. 차별화된 내용을 얼마나 논리적이고 정서적으로 설득해 고객의 신뢰감을 확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방법을 알고 있느냐 모르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실행하고 있는가이다.
일본에서 활발히 수주활동 시 일본 사람들 대부분은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르고 몇몇이만 하는데 내가 업무 협의나 술자리에서 영어와 일본어를 모두 구사하는 것을 보고 많이들 부러워하고 특히 나한테 윤부쪼상 ( 윤부장 ) 하며 도와도 주고 친분도 쌓아 그 후 한동안 미스터 하야시와 이시바시라는 일본 직원과는 친구처럼 지내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각자 가정에 초대되어 놀기도 하고 서로 좋은 곳에 데려가 관광도 시켜주고 술자리 또한 많이도 갖었다.
한번은 일본 요꼬하마 술집에서 일본 직원들하고 회식 할 때 내가 지금의 일본 천황이 옛날 한국 가야국에서 일본으로 쫒겨난 백제인 이라고 얘기했더니 갑자기 참석 인원의 절반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바람에 곤욕을 치룬 적이 있다.
내가 그들의 우상이자 절대 권력의 신을 모독했다고, 헌데 역사적으로 맞는 말인데 하여튼 그 후 한일 역사문제는 사적 자리조차도 대화에서 제외하고 현재를 중시하는 기술 협력을 도모하고 우정도 쌓으며 출장 갈 때마다 도꾜, 아키아바라, 요꼬하마 등에서 술자리도 많이 가졌는데 술 문화가 한국하고 비슷해서 좋았고 한번은 요꼬하마 2차로 들른 살롱이 단골이 되어 자주 갔는데 일본 여자 종업원들이 상당히 친절하고 특히 한국인을 좋아해서 더 잘해주는 것 같았다.
특히 놀라운 일로는 먹다 남는 술을 맡겨놓고 수시로 가서 찾아먹는데 1991년에 그간 2년여에 걸친 용역이 끝나고 일본 갈일이 없다가 2005년도에 도원 회장 때 일본과 태양광 사업협의차 일본에 오랜만에 가서 요꼬하마의 친구 햐야시를 만나 단골 술집을 15년 만에 방문하여 오랜만에 젊은 날의 패기를 생각하며 추억에 잠겨 회상하다 깜작 놀랄 일이 세 가지나 있었다.
하나는 15년 전에 내가 마시고 맡겨둔 산토리 위스키에 하얀 리퀴드로 윤부쪼상 이라고 적혀있는 술병을 그것도 그때 헤이꼬 라는 마담이 나를 알아보고 갖고 왔을 때 희한하기도하였지만 그 친절한 보관 시스템과 손님관리, 오버하는 애교, 간지러운 친절이 무섭도록 등골이 오싹한 일 이었다.
물론 그날 다 마시고 또 새 병을 따서 먹고 다시 내 이름을 적어놓고 맡기고 와서 아직 찾아가지 못했는데 이자서전을 다 쓰고 출간한 뒤에 아들과 한번 갈까하는 즐거운 상상에 다시 또 기분 좋게 취해본다.
또 하나의 이상한 일은 내가 그렇게 잘하던 일본어를 인사말 이외에는 다 잊어버려 한마디도 못한다는 사실에 나도 놀라고 일본친구들도 의아하게 생각하여 곰곰이 원인을 따져보니 30대 중반에 벼락치기로 일본어 공부를 하여 2년여 써먹고 15년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으니 자연 도태되어 내 머리에서 지워진 것이다.
어느 책을 보니 30대 후반에 익힌 언어는 저장이 잘 안되고 쓰지 않으며 잘 지워지고 기억력이 쇠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다행히 나의 경우 영어는 20대 중반에 중동에서 배우고 그간 해외 출장 등으로 수십 번 다니고 국내 플랜트 EPC 업무에서도 영어로 많이 일한 덕분에 아직도 잊어버리지 않고 잘 써먹고 있다.
그래서 요즘 대학교에 강의 다니며 학생들에게 이러한 에피소드 얘기하면서 일생에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타이밍이라는 게 있으니 여러분은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훗날 후회하며 10대에서 20대는 공부에 전념해야 할 때이고 졸업반 일 때는 취업에 집중하고, 사교적이고
친구를 사귀고 연애할 때,
적령기에 결혼해야 할 때,
자식을 낳고, 키우고, 놀러 다닐 때,
돈을 한창 벌 때,
나이 들어서 친구가 없어 반려동물과 놀 때,
주변의 정리로 취미활동에 집중 할 때,
모든 생로병사의 인생사에서는 모두다 그 순서가 있고 때가있는 것으로,
이것을 미루거나 시간의 순서를 바꾸어 하다보면 인생을 망치거나 실패하기 쉽다는 것을 누누이 설명하곤 하였다.
중요한 것은 젊은 날의 여러분은 대학에서 졸업이 다가오면 취업을 위해 인맥을 쌓고 사회생활을 활발히 할 때
반려견하고 놀면 인생도 개판이 되고,
또는 게임이나 오락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중요한 일을 앞에 두고 졸업기념 등으로 해외여행 하여 시기를 놓치면,
인생 전반이 실패로 끝나다는 이유로 강의하면서 아래와 같이 사회에 진출하는 졸업반 학생들이나 일반인의 취업에 관한 유익한 정보와 바른길을 추가로 강의 말미에 전해주면 상당히 반응이 좋았다.
강의자료 - 졸업 예정학생의 취업을 향한 꿀TIP
목표를 향한 집중과 선택
- 기존 인맥 지도 작성 및 활용 방안 점검
- 새로운 인맥 네트워크 구성
- 취업과 관련 없는 분야 만남, 습관, 낭비 유보
- 모임, 정보 ,행사 교육 세미나 적극 참여
- 마음 ,기술 ,육체를 갈고 딱으며 기다린다
2. 실제 취업 진출 상황 시 활용 방안
- 배수의 진을 치고 목표 도달까지 꾸준히 돌진
- 인터넷 SNS 상시검색 및 게시-
- 발품도 팔지만 인터넷으로 손품도 팔아야한다 -외국기업협회, 정부투자기관,
중소 강소기업 1차 벤더, 지역별 분야별, 산업단지, 기술협회 등
- 인터넷으로 사람인, Incruit, Jobkorea와 친해지기
- 전공 탈피, 변형 공략 로드맴 작성 ( 지역, 업체, 분야별 )
- 파격과 적극적 자세로 소개서 작성, 제출, 게시 ,만남 시도
- 차별화된 이력서작성 ( CASE별로 2-3가지 이력서 지참 )
현장이력, 수행사업 명 표기, 단기경력 기재, 희망부서 오픈
- 강소 기업 찾는 기술/ 중소기업에서 중견, 대기업으로 가기
3. 면접 실행 요령서
- 입장 시 복장과 자세 시선 고정 (5초안에 끝남)
- 면접 전 해당회사 조사 및 관련자 검색 및 철저히 파악
- 면접 실제상황 리허설 ( 자기소개, PT 이력, 성과 , 포트폴리오 자료 준비, 포부,
존경하는 인사 예상 질문에 철저 대비 )
- 전공에서 탈피 다양성 주고 희망부서 직종을 OPEN
- 갖고 있는 스펙보다 자기의 가치 표현과 나만의 브랜드 광고
- 된다는 긍정의 마인드 / 발밑은 현미경 미래는 망원경으로 - 이상 -
4-3-1 영업에 달인이 되다
동아 엔지니어링에서 사업부장을 맡아 국내외 사업을 관여하면서 영업도 정식으로 뛰어 해외는 일본에 출장 가서 지요다, 산꼬의 기술용역을 수주하여 수행하였고, 국내는 한국 가스공사에서 발주하는 LNG 천연가스 인수기지 플랜트와 관로 기술용역을 직접 수주하여 수행하였다.
이 당시에는 국내에 처음으로 천연가스가 도입되어 LNG관련 플랜트 건설이 한창일 때인데 국내에서는 현대건설, 대림산업, 대우건설 3개사만이 실적을 갖고 있어 그 많은 공사와 기술용역을 나눠 먹기식으로 독점 수주하여 동아엔지니어링은 참여조차 할 수가 없는 조건이었는데 내가 맡은 배관사업부가 주도하여 아무것도 해당되지 않는 조건에서 지방 도시가스 실적도 만들고 치밀하게 자격 요건을 만들어 한국 가스공사 설계 입찰 준비를 철저하게 준비하느라 여름휴가도 반납하고 연일 야근과 끈질긴 회유와 미팅 그리고 타 회사 자료도 비밀리에 수집하여 결국은 입찰서류 만들어 제출하였다.
하늘이 도왔는지 거의 맨바닥에서 일으킨 기적과도 같이 동아엔지니어링이 입찰 자격을 4번째로 획득하여 LNG 인수기지 플랜트 설계와 전국 천연가스 관로 설계 용역 등을 여러 번 수주하게 되었고 수주 금액은 20억에서 100억대로 매년 수주하는 성과를 나의 의지와 완벽한 실행으로 인해 회사도 급신장하고 매출과 전체 직원 수도 두 배로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맡은 부서 직원도 50여명이 넘고 내가 들어올 때보다 회사도 커졌고 수주분야도 건설을 포함해서 다양해졌다.
수주와 사업부 실적이 회사 내에서 독보적으로 좋아져 최원석 동아 그룹 회장으로부터 상장도 받고 포상휴가로 호주에 다녀오고 그 당시 동아건설그룹에 흔치 않은 39살에 전격적으로 부장 특진을 하게 되었다.
이때 나에게 부장임명장을 주던 관리전무가 하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당신은 안양공고 출신으로 이렇게 일찍 부장으로 진급했으니 대단한 일이네 하고
그랬다 내가 회사생활을 시작 하면서 항상 나의 핸디캡은 최종 학력 이였다.
전 엔지니어링서부터 경남기업, 동아건설 그룹이 전부 대기업인데다 주변 동료들은 대부분 대학 졸업자들이고 기술사, 석 박사들이 즐비한 경쟁체제에서 뛰어 넘거나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여 남보다 더 지독하게 일을 해야만 했고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온 덕에 그들보다 항상 먼저 진급하고 인정도 받고 독립적인 기술 경쟁력도 남보다 더 억척스럽게 하여 나는 늘 그들보다 선두에 서 있었다. 지금 내가 생각해봐도 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며 한편으로는 그동안 살아온 나의 힘들었던 과거에 뜨거운 눈물을 훔친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한테 이야기 한다 주어진 환경과 조건이 미흡하더라도 탓하지 말고 더 집중하고 베스트를 다한다면 죽고 싶거나 지독한 나쁜 조건 때문에 여러분은 더 강해질 수 있는 적응력과 힘이 생길 것이고 시간이 그대들을 도와주어 당연히 결과도 좋아진다 라고.
이때가 직장 생활의 전성기로 영업도 많이 하였지만 회사 경영에서 배운 것도 많고 주변에 인정도 받고 사회적으로도 한 단계 도약하여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며 영업선인 인맥도 다양하게 형성되어 나중에 도원 그룹 영업과 관리, 경영에 실질적인 도움과 경험 하는데 최고, 최적의 시간 이었다.
안 좋았던 일로는 정부로부터 발주하는 관 공사 영업을 건설회사와 공동으로 하면서 대형 건설사 일부가 공무원을 매수한 사건에 동아가 일부 연루 되어 내가 영업부장으로 있었던 탓에 대표 선수로 걸려든 사건이다.
어느 날 이른 아침에 분당 집에 찾아온 검찰 수사관에게 끌려가 한동안 곤욕을 치루기도 하였지만 군대서 배운 참을성과 통신보안, 유격훈련을 경험삼아 처음 보는 거친 교도소 수감의 치욕과 검찰의 회유 공갈과 어려움도 환경 적응 덕택에 잘 이겨내어 회사에 누를 끼치지 않고 내선에서 마무리하고 풀려나 며칠 후 본사로 복귀하여 보니 어느새 회사 내에서 쑥스럽게도 영웅이 되어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많은 것을 배웠고 사회의 정의로움 실천에는 항상 초심을 갖고 조신하게 작은 법규나 규칙도 정도로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름은 잘 모르지만 미국의 저명한 정치가가 한말이 생각이 난다.
“ 내가 지금 하는 일탈의 행동과 행위가 내일 아침 신문에 실려도 부끄러움이나 구속이나 법적 문제는 없는가를 보고 신중히 결정 하여라”라고 한말에 따라 모든 계약, 약속, 중요한 결정 때는 두 번 세 번 생각해서 행동하는 처신을 안타깝게도 많은 것을 잃고서 나이가 한참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영업을 활발히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골프도 이즈음 배워 1년 만에 싱글을 칠 정도로 정신, 육체, 사회적 지위 모두가 최정상 상태였다.
또 하나 기분 좋은 뉴스는 내가 일본에 출장 다녀오니 아내가 쌍문동에 전세로 살면서 청약한 분당 신도시 초기분양에(파크타운) 70여대1의 경쟁률을 뚫고 극적으로 당첨되어 돈도 벌고 10여년을 이어간 신천지 분당의 시대 긴 시간을 행복과 함께 시작되었고 당연히 그전보다는 더 나아진 풍족한 한 차원 높은 생활을 하였다.
아이들도 탈 없이 잘 자라주었고 분당에서 공부도 상위권으로 잘하고 작은 아이는 학교에서 회장까지 맡으니 집사람도 만족하여 모든 것이 즐겁고 완벽한 분당생활이 황금의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까지 거의10년 간 이어졌다.
안양 과천 쌍문동에 이어 들어온 분당에서는 그 뒤로도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
우선 아파트도 40평에서 50평으로 늘었고 부동산과 재산도 조금씩 불어 중산층으로 부족함이 없이 그야말로 내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태평성대의 날이 이어졌고 운동도 골프를 하다 보니 스키나 테니스, 볼링 보다 자주 필드에 나가 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쌓아가며 밤 낮 없이 항상 태양이 떠 있는 것처럼 무엇엔가 취한 듯 멋진 “위대한 캐츠비“같은 소설속의 나날이었다.
4-4 건설이 그림을 그리다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친구들과 나누었던 뜨거운 우정과 형제처럼 동거동락 하던 시절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기경회 라는 모임은 1970년부터 경남엔지니어링에서 같이 근무하던 오랜 동료들의 모임으로 50여 년간 세월 속에서도 지금도 변함없이 우의를 다지고 있다.
그중 나와 가장 친한 친구 김기열이는 나하고 모든 것이 다 잘 맞는 성격으로 취향도 같고 술도 기분 좋게 기꺼이 같이하는 사이로 서로 속 깊은 얘기도하고 집사람과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 주말이면 온가족이 다함께 만나고 여름휴가도 같이 가고 집안의 경조사도 같이 나누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나에게 솔깃한 제안을 하는데 뜬금없이 같이 그림을 그리자고 제안하며 홍익대학교 미술교육원에 정식으로 입학하여 같이 다니자는 제안에 나 역시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고 흥미가 있어 1993년부터 4년간 유화 그리기에 빠져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서고 많은 작품을 그리며 소질이 있다고 한때 착각하여 유명화가 되어볼까 하는 꿈도 즐겁게 꾸기도 하였다.
같이 그림 배우는 중년의 학생들과도 친해지고 화우회 라는 모임도 결성하여 1년에 3-4번은 종로 인사동 화랑에서 그룹 전시회도 열고 작품도 많이 남기고, 그림 그리는 과정에서 피어난 우정과 또 다른 추억이 회사일로 힘든 나를 많이 위로해주고 행복한 시간을 주었는데 일본 일로 출장이 많아지고 부서장으로 회사일이 많아져 나는 화백의 길을 3년 만에 포기하였으나 김기열씨는 그 후로도 몇 년을 계속해서 그림그리기에 매진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98년 인사동 화화회 유화 그룹전 아내와 함께
뒤에 내가 그린 그림이 쑥스럽게도 숨어 보인다
어느 건설인이 한때 화가로 알고 그림을 그리다 말았다
옛날 일을 떠올리며 글을 쓰다 보니 좋았고 행복했던 시간에는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어 쓸 말이 많지가 않은데 힘들고 어려웠을 때는 사연도 많고 할 말도 많은 걸보니 인생이란 모름지기 행복, 불행, 슬픔과 기쁨, 성공, 실패가 같이 공존하며 사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생각하며 좋았을 때보다 열악한 환경의 과정이 더 사연도 많고 더 깊이가 있고 심오한 단련을 주어 탄탄한 생활을 견디어 나가게 만드는 과정인 것 같다.
호사다마일까? 차가운 바람이 분당 중앙공원 자작나무 잎을 날리는 어느 날,
풍요의 끝자락이 스물 거리며 보이기 시작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결국은 1997년 IMF사태로 모든 것이 파국으로 치 닿는 시기가 왔고 나 역시 대비를 안 한 결과로 피하지 못하고 모든 시련이 쓰나미처럼 한꺼번에 정면으로 덮쳐왔다.
4-4 아 - 동아건설 그리고 창업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과 함께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와 중국과의 수교로 무역량이 늘어 1인당 GNP가 만 달러를 돌파하고 OECD가입으로 국운이 상승 하는듯한 분위기가 2-3년 이어져 지내던 중 1994년 10월21일 동아건설이 시공한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일어났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聖水大橋崩壞事故)는 서울특별시의 한강에 위치한 다리인 성수대교에서 상부 트러스가 무너졌던 사고이다.
이 사고로 17명이 다쳤고 32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이때부터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불안감이 들던 중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과 중동으로부터 시작된 해외 경기마저 위축 되어 떨어져 급기야 대한민국이 최초로 외환위기에 내몰렸다.
그 당시 신문에 난 한국의 1997년 IMF 위기의 원인을 둘러싼 여러 논란이 있지만, 외부 충격과 내적 취약함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세계화와 금융 자유화의 흐름 속에 대규모로 유입된 국제 금융 자본의 투기적 공격이 외적 요인이라면, 1996년 OECD 가입 후 적절한 감시와 재정 위기관리 대책, 시장에 대한 정부 개입 및 투명성 결여 등 제도적 대책이 미흡한 상태에서 과도한 개방 정책을 폄으로써 금융 자본의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내적 요인이다.
또한 외환 정책/금융 감독/자본 자유화 정책과 업종 전문화 제도의 실패라는 한국 정부의 미숙한 대응도 문제였다. 이러한 국내외의 요인 위에서 한국은 결국 초유의 위기 상황을 맞게 된다.
IMF 시절 겪게 되는 상황은 두 가지 부류로 기업이나 개인이나 흥하느냐 망하느냐가 딱 하나의 차이이다. 바로 현실을 직시하고 현금을 얼마큼 보유하고 있느냐는 차이뿐 이었다.
나는 선천적으로 현금보유보다는 투자를 주로 하였고 대부분 사람들이 나와 같이 은행돈이나 빌린 돈으로 부동산, 주식, 회원권등 유가 증권과 사업에 투자한 기업과 개인은 파산 고통의 직격탄을 맞았고 현금을 선호해서 현금을 갖고 있거나 은행에 적금 및 현금성 채권을 가지고 있는 기업이나 개인은 화폐의 가치가 올라가면서 부자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연달아 부동산이나 모든 주식이 폭락하면서 돈이 있는 사람들은 손쉽게 부동산을 골라서 매입하고 회사를 인수 합병하여 부의 영역을 확장하는 절호의 계기가 주어졌고 그러한 사람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많이 보아왔다.
나는 불행하게도 이 시대에 닥친 초유의 위기에 전자 경우로 현금을 갖고 있는 것 보다 부동산 주식 투자형태의 포트폴리오로 현금보다 부채가 더 많았고, 분당 집과 춘천, 광주 부동산 그리고 주식을 갖고 있었으나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과다한 대출금이 문제였다
우선 부동산 폭락에 주식이 떨어지고 설상가상으로 동아건설이 정치적 구설수와 경제 불황 직격탄을 맞아 1998년 중반 부도로 처리되어 도산하면서 많은 회사가 문을 닫게 되는데 그중 내가 10여 년간 몸담고 있던 동아엔지니어링도 부도가나서 퇴직금도 못 받은 채 직장생활 30년 만에 처음으로 실직자가 되었다.
모든 동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져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자 그동안 호황기에 위기를 대처하지 못하고 위기를 맞은 나도 낙담하여 깊은 슬럼프에 빠져 무력한 날을 보내며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힘든 시간이 되었다.
몇 달간 분당 아파트에서 칩거하며 무언가를 찾고 있을 때 취업이냐 사업을 직접 하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동아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찾아와 토론하던 중 새로운 도전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간 국내외에서 쌓아온 경험과 높은 나만의 내공도 있었지만 내가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 새로운 기록을 써나가는 데는 그렇게 많은 고민과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 나이가 고작 40대 중반이고 그간에 별별 고초를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는데 두려움과 어려운 환경은 오히려 불쏘시개가 되어 내 몸에 뜨거운 열정과 자신감이 솟구치게 만들어 우선 신규 가능한 사업계획을 짜고 D-Day만을 기다려 과감한 결단의 행동을 하게 된다.
부동산 중에 땅은 매매가 그 당시 안 되어 그냥 놔두고 주식은 손절매로 헐값에 처분하고 분당에 살고 있던 아파트를 팔아 그 돈으로 집사람과 고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와 중학교 2학년인 아들을 뉴질랜드로 이민 유학을 보내기로 하고 나는 남은 자금으로 단호하게 그러나 전략적인 배수의 진을 치고 거의 맨몸으로 회사를 설립하여 길고도 혹독한 창업 초기의 과정을 맞이하게 된다.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으로부터 최우수 부서상 수여 1993.5월
동아엔지니어링 부서장들과 함께
배관사업부 직원들과
1993년 수상후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님과 -
5. 바닥에서 시작한 10년의 열정
5-1 도원 엔지니어링에서 도원 디테크 건설 창업
이번이야기 부터는 -
자서전 - 꽃잎은 물에 젖지 않는다 (제2부)
제 2부로 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