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정을 시로 물 드린 윤해균의 회상 기록을 매일 혹은 주간으로 연재
목 차 ( LEGEND )
2부 - 5. 바닥에서 시작한 10년 열정과 성공
1) 도원 엔지니어링 , 도원 디테크 건설 창업
2) 도원의 태동과 흐름
3) 감성 건설 경영에 시를 입히다
4) 회장의 하루 일과와 건설현장 일기
5) 기업인 대표로 평양 방문기
6) CEO 반성문
7) 지루한 법정다툼의 결말
6. 다시 시작한 제3의 길
1) 두 번의 건설 위탁 경영과 성과
2) 마지막 창업- 불꽃을 태우다
3) 대학에서의 플랜트 EPC 건설 강의
7. 정시에 찾아온 따사로운 시간
1) 맞춤 운동의 생활화
2) 손주 바보가 된 할아버지
3) 기회는 세 번이다
4) 행복하기보다는 가치 있는 삶
5) 쓰면서 화해하고 치유하니 행복하다
6) 작가의 길
8. 시와 수필 Scrap
1) 왕년 정산 후 다시 꿈꾸는 슈퍼 애벌레 외
글을 마치며 에필로그
첨부 : 윤 해 균 걸어온 길 (연보)
5. 바닥에서 시작한 10년의 열정
5-1 도원 엔지니어링에서 도원 디테크 건설 창업
무엇을 믿고 그랬는지 지금도 이상하리만큼 자신이 있었던 것은 험한 세상을 거침없이 살아오면서 얻은 귀중한 경험과 가슴 가득 열정을 품은 47살의 잘 익은 청년 정신을 가진 아직 피어보지 못한, 제대로 된 전투를 못하고 좌천된 장수 기분 탓이었을 것이다.
동아건설이 파산하고서 집에 찾아온 직원들과 혁명과 같은 계획을 만들어 여러 가지로 살아가는 궁리를 하며 드디어 시동을 걸게 된다.
우선 옛 동료 유태준씨가 자리 잡고 있는 양재동 말죽거리 사무실 일부를 빌려 일터로 삼고 파산한 동아엔지니어링에서 사무가구와 기술자료 비품을 사다 옮겨놓고 실직한 동료 10여명이 모여 자본금과 실행할 수 있는 사업계획 등을 준비 하긴 하였으나 진짜 아무것도 없이 공격적으로 이름만 먼저 걸어 놓았다 아이도 태어나면 이름을 짓듯이 “도원 엔지니어링 주식회사”.
IMF 사태로 모든 경기가 얼어붙어 재취업이 어렵고 특히 건설 분야는 계속 구조조정으로 이력서 낼 곳조차도 없는 파국의 시대였다.
출근 할 때가 없었던 동료 기술자들이 삼삼오오 내사무실로 놀려와 눌려 앉아 하루를 소일하고 저녁에 회사 밑에 있는 삼겹살집에 가서 소주를 먹으며 그래도 미래를 밝게 보려 무지하게 애쓰고 취해버렸던 그토록 무기력한 세월 이였다.
시간이 고통과 문제를 해결해주듯이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가지 사업을 할 수 있는 분야가 검토되고 그중 미국에서 어린이 백화점 사업을 하는 동생과 통화하다 국내의 어린이옷 미국 수출을 하기로 하고 선적하고 남은 재고품을 국내에 팔면 돈이 될 것 같아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을 독려하여 길거리로 땡 처리 판매를 하였는데 의외로 장사가 잘되었다.
개업 후 몇 달 만에 처음으로 회사에 돈이 들어온 것이다. 세상에나 쟁쟁했던 건설 기술자들이 창피를 무릅쓰고 자동차로 아파트 단지를 돌며 재고품을 팔고 있으니 이것은 실화로 나중에 KBS 인기드라마 인생 대역전의 용사 편에 방영되기도 하였다.
옷 판매 수입에 힘입어 두부제조기, 시들지 않는 꽃, 영문 번역일등 돈 되는 일은 무엇이든하며 사무실을 꾸려 나갔고 이때 집사람도 수원 영통에 어린이 옷 판매 대리점 “베비라”를 오픈하여 거의 1년간 점주로 일하며 나를 도와주었는데 매달 여기서 나오는 수입을 받아 도워 엔지니어링 직원들 봉급도 주고 하였다.
나한테 시집와서 처음과 마지막으로 일을 맡겼고 돈도 벌어 나를 도와준 것에 대해지금도 그때 고생한일을 고맙게 생각하며 도원 그룹이 큰 회사가 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회사를 개업하여 이름만 엔지니어링 회사이지 건설 기술용역 일감이 없다보니 거의 1년여 간은 주력 사업이 아닌 외도로 회사경영을 간신히 유지하였다.
1년쯤 지나자 회사 모양도 만들어지고 회사와 기술자들의 본연의 업무인 플랜트 설계업무도 조금씩 늘어나 사업에 집중하는 전력투구의 시기가 도래했다.
그리고 이때 학교에다니던 아들과 유학을 이야기하다 미국 동생 집으로 보낼까하다 딸애와 아내까지 외가친척이 살고 있는 뉴질랜드로 이민은 아니지만 유학길에 떠나보낸다.
배수의 진을 친 것이다 돈이 되는 것은 아파트를 포함 모두 팔아 아이들 유학자금으로 주고 남은 돈으로 분당 오리역에 있는 시그마 오피스텔 하나사서 나 혼자 들어가고 남은돈은 회사 자본금이 되어 죽기 살기로 배수의 진을 치고 벼랑 끝 전술로 이겨 나가자했고 결국은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하여 10년이 채 안되어 누구나 부러워하는 중견 기업으로 우뚝 자랑스럽게 성장한 것이다.
쓰린 가슴의 경험은 사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윤 해 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이유는
내가 살아있다는 소중함을 느끼고
일터로 빨리 가고 싶은 마음과 함께이다
부산함을 뒤로하고
분당을 출발
서울을 향해 구룡 터널을 지나면
300년 향나무가 길 양쪽에 심어져 있다
당연한 듯 숙연한 마음으로 절을한다
최선을 다했어도
또 절을한다
절하는 순간 절절히 비는 마음에
왠지 가슴이 쓰려온다
자신을 하면서도
어렴풋한 한계를 느끼며
성황당 누구에게 빌듯이 기대어 본다
그리고 나면 강남이 보인다
왼쪽엔 타워팰리스 다정한 이웃너머
우리의 현장에 도착하면
그렇게 하고 싶었던 숱한 일들이
이제는 강해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도원엔지니어링 1998년 창업 초기 용호빌딩에서 창립멤버 기념사진 /
뒷줄 3 번째 부터 이상민부장,김한필전무님,백현차장 3인은 도원창업과 성장에 초창기 창립 멤버로 크나큰 업적을 쌓고
2009년 도원건설이 퇴출될때까지 같이한 훌륭한 동지이자 최고의 수훈을 세운 협력자였다.
아래의 글은 그 당시 도원이 1998년 창업하여 초창기부터10여 년간 숨 가쁘게 달려온 성장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도원 엔지니어링의 성장기록
1. CEO 단상
2. 도원의 흐름과 창업 정신
3. 회사 태동의 고통과 극복기록
1. CEO 단상
장마가 시작될 즈음인 1998년 7월 13일 마구 내리는 빗속으로 용달차 3대가 말죽거리로 들어오고 있었다.
도곡동 사무실로 얼마 전 파산한 동아의 기술 자료와 가구 등을 옮기면서
그날은 참으로 깊은 계곡에 힘든 사람들과 같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20여명의 동료들이 빗속에 짐을 옮기는데 누군가 비 오는 날 이사하면 잘산다는 덕담의
작은 기대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보이는 것이 없는 출발이었다.
옛 직장 동료 10여 명이 모여 도원기업의 상호로 출발한지 어언 8년, 당시 IMF로 퇴출된 동아엔지니어링의 서글픈 종말을 딛고 다시 엔지니어링의 작은 불씨를 살리려고 애쓰던 초창기 모습이 이렇듯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IMF의 혹독한 경제 환경에서, 기댈 곳이라고는 아무데도 없는 무지공처의 환경에서
그나마 20평도 안 되는 사무실 운영비라도 건지려고
유아복 재고품을 전주에서 싣고 와서 아파트 단지에서 골라 골라 땡 처리 하던 일,
한 개 들기도 무거운 가정용 두부기계 샘플을 두개씩이나 양손에 들고 연신내에서 양재동까지 지하철로 운반하던 일,
추운 겨울 분당 이마트 앞에서 시들지 않는 장미를 팔던 여직원의 모습,
단돈 20만 원짜리 의료기기 매뉴얼 번역 용역을 받으려고 동대문 골목 의료기기 상을 찾아 헤매던 일,
지역 난방기술에 건축기사 1명의 인력을 파견하기 위해 7번이나 방문했던 기억 등 사업초기에 돈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고 보자는 헝그리 정신으로 굳게 뭉쳐 서로 격려하며 일에 몰두하던 모습을 새삼 떠올리자니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니 저려온다.
그러한 초심으로 뭉쳐 SK건설과 삼성 엔지니어링으로 이어지는 하도설계업무를 실행을 따지지 않고 철야를 해가며 몸으로 때워 노력한 것이
오늘의 도원을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제 200여명으로 늘어난 우리 도원가족과 상반기 수주 1000억 돌파를 바라보면서 그간 임직원들의 노고와 열정에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고마움과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이제 돌이켜보면 지나온 시간은 우리에게 많은 좌절과 고통을 안겨 주었지만
그 반면에 우리에겐 희망과 행운이 항상 함께 했고
그 덕분에 우리는 지금처럼 강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도원가족이 자칫 회사 급성장에 따른 매너리즘과 분파의식으로 자신도 모르게 원치 않은 방향으로 젖어 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동시에 떠오른다.
어떻게 하면 우리 도원가족 모두를 도원 창업 초기의 초심으로 돌아가 제 2의 도약을 향한 대장정에 한마음으로 동참하게 할 수 있을까?
새로 합류하는 동지들이 도원 창립 초심으로 같이 성장하는 좋은 방안이 없을까? 하고 지금도 긴장을 놓지 않고 매사 조심하고 마음을 굳혀본다.
사업 초기의 어렵고 힘든 시기 홀로 올라가 생각에 잠기던 싸리고개며, 그 옛날 출퇴근 때 일부러 돌아가던 양재성당의 성모마리아상 앞은 요즘도 자주가고 들르며 그때의 상념을 떠올리면서 항상 외치는 마음은 초심이다.
회사 CEO로서 도원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듯이 모든 도원인 각자가 한마음으로 서로 믿고 회사를 사랑해 주기를 염원하며 기도한다.
분명코 우리 도원은 더욱 성장 발전하여 일류 회사로 발돋움할 것이며,
우리의 목표이자 slogan인 ‘100년 명품기업’을 이룩하여,
한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보다 활발한 사회활동 기여를 실현하면서
최고 수준의 연봉과 사원복지로 도원가족 모두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꿈꾸면서 회사 CEO로서 한층 더 분발할 것과 도원인 모두가 각 분야 최고를 향한 선의의 경쟁을 함에 튼실한 후원자이자 공정한 관리자로서의 CEO가 될 것을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스스로 다짐해본다.
“주어진 조건이 아무리 최악일지라도 위기는 곧 기회이며 열심히 할 구실을 제공 한다”
2006년 7월 13일
대 표 이 사 윤 해 균
수원영통에서 아내가 1년 동안운영한 점포앞에서-
2. 도원의 흐름과 창업 정신
1) 경 영 이 념
信義와 기술자와 더불어 경영하고 고객의 비젼을 현실로 하여 고객이 믿고 다시 찾는 회사
2) 경영 방향
(주) 도원엔지니어링은 PLANT(공장)건설과 관련한 타당성조사부터 종합설계 시공까지 일괄로 수행하는 TURNKEY 수주 용역전문 업체로써 분야별 건설 기술자들이 모여 국내외 많은 공장건설 실적과 KNOWHOW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최근 VENTURE 공장( IT/ BT/ NT/ ET/ CT ) 건설에 ONE STOP 방식을 도입 활발하게 활동하며.
(주) 도원은 이러한 패러다임의 구체적 실현을 위하여 대전지역에 벤처공장 및 사옥 전문건설 회사인 (주)디테크 건설를 2001년 12월 14일 설립하고 이미 충북 오창 공단의 2개 사업 및 사옥 건설을 수행중에 있으며, 대전지역의 광통신용 광소재개발로 유명한 젠포토닉스 사옥건설을 필두로 2003년 들어서는 활발히 참여하여 실적을 가짐.
(주) 도원 디′테크가 추구하는 FAST-TRACK 공장건설 방식은 기존 턴키방식에서 한발 더 나아가 건설 계획단계부터 부지선정, 타당성 조사, 경제성 검토 등의 사업초기계획 단계부터 사업주를 대신하여 일괄 수행하는 서비스 방식으로 특이할만한 것은 기획과 설계 시공이 동시에 이루어져서 공사기간은 물론 공사비까지 최대 15%-20%까지 절감할 수 있는 디지털식 첨단 엔지니어링 방식으로 국내에서는 삼성 엔지니어링등 대기업 몇 개 업체를 제외하고는 도원엔지니어링이 중견기업으로서는 유일하다,
또한 엔지니어 기술사등 분야별 전문가의 철저한 검증을 거쳐 차질 없는 공장건설이 되도록 지원함으로써 최적의 공장시스템, 경제적인 공사 및 공사기간의 단축 등을 보장하는 혁신적인 이 방식은 선진국인 독일, 유럽 등지에서는 이미 널리 시행 중에 있는 추세로 국내에서의 선두자리 매김을 위해 도원의 모든 기술자들은 미래를 확신하며 노력하며 진실로 신의를 제일의 모토로 삼고 있다.
3. 회사 태동의 고통과 극복
( 도원그룹 창립 10주년을 맞이하여 태동기부터 10년의 성장기를 “도원그룹 10년 발간사 ” 에 수록하기위해 자료를 찾아 기록한글 -글쓴이 김한필 전무 )
목 차
1) IMF 외환 위기와 퇴출의 아픔
2) 도원의 탄생과 헝그리 정신
3) 설계 본업인 용역수주를 향한 백의종군
4) 종합설계 첫 수주의 감동
5) 종합 플랜트 엔지니어링으로의 걸음마
6) 건설업 진입의 도전 “자! 정면 돌파 합시다!”
7) 첫 번째 공사 수주의 출발
8) 도원의 가파른 성장 그 화려함에 빠지다
1) IMF 외환 위기와 퇴출의 아픔
“자료! 보이는 대로 싣고 가자”
1998년 5월 신록의 계절, 창밖의 햇살은 여느 때처럼 따스하다.
그러나 선릉역 부근 동아엔지니어링 사무실은 적막과 싸늘함이 감돌며 가지런했던 서류와 책상, 열심히 일하던 직원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고
사람, 서류, 사무집기가 제 각각으로 모두가 방향 잃고 표류하는 배와 같다.
공통된 마음은 한 치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위기감이다.
책임감과 일에는 어느 엔지니어링 회사 직원보다 강인함을 보인 동아엔지니어링 사람들…
IMF 외환위기라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환경에 모두가 넋을 잃고 만다.
1998년 5월 9일 그룹사 유일하게 퇴출의 멍에를 이고 희생된 동료직원들…
누가 누구를 위로할 겨를도 없다.
국가적 경제위기 상황은 새 직장 구할 엄두도 못하는 분위기로 남은 직원은 여기저기 무리 지어 앞날 걱정을 하며 옥상에서 먼데 바라보며 담배만 뿜어대는 동료직원이 자꾸만 늘어가고,
그렇게 25년의 역사와 450여명의 동아 그룹 계열 동아엔지니어링은 사라져 갔다.
그러나 그렇게 모든 게 끝난 것이 아니라 그 강인함은 절망 속에서도 돌파구를 찾아 움트고 있었다.
이렇게 몰락해가는 동아엔지니어링의 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국내 플랜트엔지니어링 역사와 함께 엔지니어링 외길을 걸어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미 6개월 전인 2007년 12월 퇴사한 윤해균 부장 – 전형적인 엔지니어다.- (배관사업부장, 개발사업 부장)
탁월한 영업 능력으로 동아엔지니어링 플랜트 사업본부의 수주 영역을 넓힌 공과로 그룹 회장의 포상을 받기도 했고 매사에 긍정적으로 임하는 그의 적극성은 동종 경쟁업계(현대ㆍ대우ㆍ대림 엔지니어링)의 주목과 질시(?)를 받아왔다.
1992년 가스 공사의 전국적인 LNG 배관망 사업에 신규 진입한 이래 가스공사 기술 용역만 140억 이상을 수주하는데 기여한 기록은 이를 대변해 주고 있다.
윤해균 부장의 활동을 소리 없이 뒷받침하고 있던 직원 중 공정한 과장, 유승목 대리, 김상중 대리가 있었고 당시 회사가 퇴출될 때까지 잔류하면서 몰락 현장을 목격하며 지휘관 없는 병사처럼 아파하기만 했다.
480명을 먹여 살린 각종 기술 자료, 컴퓨터, 사무집기 등 부모 잃은 고아 같은 모습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저거 대책 없이 내팽개쳐야 하나?”
세 사람은 단숨에 분당 윤해균 부장 자택으로 뛰어갔다.
몇 개월 동안 집에서 대안을 찾던 윤부장은 비장한 모습의 부하 직원들을 보는 순간 뇌리에 소명감이 스쳤다.
반평생 국내외 플랜트엔지니어링 일선에서 잔뼈가 굵은 본능적인 반응으로 손때 묻은 회사 자료, 사무집기를 그대로 죽게 할 수 없었다.
부하 직원의 건의로 당장 실행하기로 뜻을 따라 “자료! 보이는 대로 싣고 가자”
윤부장의 이 한마디는 비장함이 감돌고 서둘러 양재 은광여고 이면 길 언덕 조그마한 5층 빌딩(용호빌딩)에 20여 평반 쪽 4층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1998년 7월 OO일 양재전철역 이면도로 은광여고 언덕길로 질척질척 내리는 비를 맞으며 3대의 용달차가 힘겹게 올라온다.
눈에 익은 책상, 걸상, 회의 탁자, 각종 기술자료, 행정 자료 등을 가득 실은 모습은 왜 그리 힘들고 피곤하게 보였는지…
2) 도원의 탄생과 헝그리 정신
“무얼 하지? 돈 되는 것이면 무엇이나”
서울 강남구 도곡동 947-30 용호빌딩 401호.
20평도 안 되는 반 층에 책상, 탁자, 집기, 서류 등을 배치하다 보니 책상은 달랑 6개 밖에 더 놓을 수 없어 사장, 직원 자리 구분은 사치에 불과하다.
1998년 7월 13일 개업 첫 날,
개업은 했는데 무엇부터 할 것인지 서로 얼굴만 쳐다본다.
대림, 삼성, 현대 등 그룹 엔지니어링 출신들은 그나마 구조조정과정에서 모기업이 살아있어
기댈 수 있는 언덕이 있으나 유독 동아 그룹은 모기업 건설마저 휘청거려 기댈 수 있는 형편이 안 되어 자수성가를 해야 한다.
“무얼 하지?”
자회사 출신에게 일감을 주기도 어려운 상황인데 타 그룹 모기업에 일감 얻는 것은 엄두도 안 나는 상황으로 ‘자, 이제부터 가릴 것 없이 돈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해 봅시다!”
여기서 도전적인 한마디는 그대로 도원의 당면 목표로 설정하여 당시 윤해균 사장, 김한필 전무, 공정한 부장, 김상중 부장, 유승목 차장, 백 현 차장의 얼굴엔 말없는 눈빛으로 생사고락의 각오를 다지고 오히려 희망의 미래를 기약하는 덕담으로 서로를 격려한다.
그 날 저녁 은광여고로 향하는 이면도로 입구의 삼겹살 집 (역말 갈비집)으로 가서 건배하며 부딪치는 소주잔 소리는 도원의 출정을 알리는 북소리 자체이며 사장이 워낙 애주가라 너나 할 것 없이 듬뿍 취하며 서로를 다짐한다.
“우리는 잃어버린 엔지니어링 회사를 꼭 되살려 본연의 업무에 복귀하자!”
도원은 우선 세 방향으로 초기 일감을 찾기로 한다.
첫째, 밑바닥에서 업종을 가리지 않고 최소한의 초기 회사 운영비라도 건진다.
둘째, 엔지니어링, 건설 기술 인력 파견으로 엔지니어링 기술자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셋째, 기술자료 통ㆍ번역 서비스를 통해 기술 능력을 지속 배양한다.
돈 되는 것이면 전공을 떠나 무엇이든지 해야겠다는 헝그리 정신…
사장을 포함한 다섯 명은 닥치는 대로 팔방미인이 되어야 하는 이 상황에서 절박하여 다음과 같은 슬픈 에피소드를 남긴다.
사장과 김상중 부장은 베비라 전주 공장으로 승용차를 몰고 가서 창고에 재고 정리 유아복을 대충 골라 뒤 트렁크와 뒷좌석에 잔뜩 싣고 상경하여 길거리에서 판매하고 판로만 열려 돈이 되면 베비라 외에 아가방 등으로 확대하여 유아복 ‘땡처리 장사’를 군포, 신갈의 아파트에서 생전 해보지 않던 ‘골라골라~’를 외친다.
당시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터라 싼 값에 주부들이 모여 평일엔 이삼십 만원, 주말엔 오십 만원 이상이 팔렸다.
상태 좋은 유아복은 별도 선별하여 중국, 미국 등 지인을 통해 샘플도 보내고 하였으나 수출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 당시 가정용 두부 제조기 회사와 연결이 되어 ‘그래도 기계는 기계인데… 우리 기술인들이 한 번 판로 개척에 나서 샘플을 가지려 늦여름 유난히도 햇살이 따갑고 무더운 한낮 김한필 전무는 지하철로 연신내로 향한다.
그리고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30여분…
절반이 비포장인 시골구석에 이온맥㈜ 공장으로 도원은 내수 판매는 별도로 하고 수출은 아직 에이전트 계약이 안 된 오세아니아(호주, 뉴질랜드) 지역을 개척하기로 하고 돌아오는 길에 하나 들기도 꽤 무거운 두부제조기 샘플 두 개를 양손에 들고 가기가 막막한데 친절하게도 공장에서 승합차로 연신내 전철역까지 바래다주어 전철을 타고 돌아와 임무를 마친 군인이 귀대하듯 김전무는 양재에서 도원 사무실로 전화로 SOS를 친다.
윤사장은 샘플 한 개를 분당 집으로 가져가서 부인까지 동원하여 아파트 주부부터 공략할 심산으로 직접 팔 걷어 부치고 이웃 주부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설명회를 갖기도 했다.
요즘 두부제조기는 당시보다 크기가 절반 이하로 물론 작동도 매우 간편하여 그래도 10여대를 팔고 호주, 뉴질랜드 현지 연고를 통해 수출을 시도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간편하게 사먹을 수 있는 두부를 가정에서 만들어 먹기에는 한계가 있고 판매가 줄어들어 사업을 접었다.
‘그래도 우리는 엔지니어링으로 살아왔는데…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지…’
우선 손쉬운 통ㆍ번역 업무를 시도한다.
한 페이지짜리 통ㆍ번역 서비스 홍보 전달을 만들어 팩스로 각 기관, 단체, 업체 등에 보내니
어느 날 ‘따르릉!’ 전화가 온다.
“여기 동대문에 있는 OO상사인데 일본어로 된 사용설명서 번역 되요?”
그래도 시간 여유가 있는 편인 김전무가 혼자 나서는데 가랑비가 끈질기게 내리는 숭인동 골목길은 왜 그리 미로같이 복잡한지..
몇 번을 물어물어 찾은 곳은 두 평도 될까 말까 한 조그마한 가게로 끈질긴 줄다리기 끝에 단돈 20만원에 수주하여 지하철 타고 돌아오는 김전무의 심경이 착잡하다.
그 후 10여건의 소소한 기술 자료 번역으로 푼돈(?)을 벌다가 1998년 8월말 Black & Veach 한국지사 (삼성동 소재)로부터 우여곡절 끝에 인천공항 열 병합발전소 운전 매뉴얼 영역 수주하였을 때의 뿌듯함은 어디서 왔을까?
아마도 동아엔지니어링에서 많이 접해본 발전소 용역의 반가우나 200 페이지가 넘는 기술 자료를 10여 일로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한여름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도원 사무실에 에어컨 놓을 형편이 안되어 에어컨 있는 옆 방 사무실(이레엔지니어링, 유태준 사장/배관설계)로 여름 내내 왔다 갔다 하면서 냉ㆍ온탕(?)을 즐기는 것도 잊고 땀 흘려 번역 일을 마치고 받은 250만원의 번역료가 그렇게 대견 할 수가 없다.
그 해 추석을 앞두고 유아복 땡 처리 수입은 사무실 운영비로 대부분 충당하고 추석 전 번역료를 쪼개어 몇 십 만원씩 떡값을 쥐어주며 윤사장은 매우 미안해한다.
꼭 엔지니어링 사업을 일으켜 정상적인 월급을 주는 날이 올 것을 몇 번이고 다짐하고 새로이 회사를 정비하고 회사의 대외 홍보가 급선무로 회사소개서(Brochure and Company Pre-qualification)부터 준비하려 공정한 부장이 주관하여 작성하였으나 상근 직이 10여명에 불과한 인원으로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한계에 부딪친다.
우선 동아 출신 인력을 총망라하고 연락망을 구축하여 기술 분야별 70여 명이 인력 네트워크에 등록하여 당시로선 대부분 정착하지 못한 기술자들이 대부분으로 이들의 일자리를 위해서라도 엔지니어링 회사를 반드시 일으켜야겠다는 사명감에 동원 가능 기술자를 포함하여 회사 홍보를 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것도 만만치 않은 것이 삼성, 대우 등 대형 엔지니어링, 건설사에 기술자 파견은 기존 파견업체와의 치열한 경쟁을해야 했고 지역 난방기술(주)에 6번이나 끈질기게 방문하여 겨우 한 사람을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동아 건설에도 리비아에 건축 설계 직 1명 파견이 추가되고 이렇게 하여 ‘맨 땅에 헤딩’ 하듯 하면서 1998년 퇴출의 아픔과 창업의 힘겨운 여정을 뒤로 하고 새해를 기대하면서 지나갔다.
창업 이래 5개월 동안 10여명 밖에 안 되는 인원에 겨우 매출 삼천 오백만원.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사무실 운영비 정도의 매출이었지만 엔지니어링 재기의 대장정을 향한 도원의 정신은 생생히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3) 설계 본업 수주를 향한 백의종군
윤사장은 반평생 플랜트엔지니어링에만 몸 담아온 외골수 엔지니어이다.
한국 플랜트엔지니어링의 효시인 전(全) 엔지니어링에 1971년 입사 후 줄곧 한 길만 걸어왔다고 선진 엔지니어링이 주도하는 EPC ( Engineering, Procurement, Construction 즉 설계,자재구매, 공사를 한꺼번에 수행하는 턴키 시스템 건설 수행 방식 )을 국내외에서 근무하면서 일찍이 체험하고 국내 건설 관행의 낙후성을 직접 피부로 느껴 왔다.
비록 현재 보잘 것 없는, 그것도 절망적 환경에서 창립한 기업이지만 훗날 선진 EPC 건설회사의 꿈을 간직하며 1999년, 창립 6개월 만에 처음으로 새해를 맞는다.
당 해 년도 사업계획을 과거 대기업이 하던 방식으로 항상 비전을 설정하고 도전하는 그의 특성이 여실히 나타나 1999년 경영 목표를 ‘회사 기반 정립의 해’로 정한다.
기업 이념으로 ‘스스로 참여’, ‘믿음과 신용’, ‘창조적 업무수행’으로 정하고 네트워크화 한 기술 인력 70여 명을 염두에 두고 사업 조직을 구상한다.
모두가 미래지향의 회사 조직체계로 창업 직후, 업종을 가리지 않고 뛰어든 유아용품 등 판매사업도 당분간 유지시키면서 1999년 매출 목표가 6억 6천 만원이다.
지금 규모에 비하면 소꿉장난 수준이지만 중견 기업의 표본을 이때부터 정립해 나가면서 목표와 도전의 틀을 훨씬 앞당겨 구체화 시킨다.
1999년 7월 9일 상호를 도원 기업에서 ㈜도원엔지니어링으로 변경하고 법인사업자로 전환한다.
새해엔 엔지니어링다운 업무에 진입하는 것이 급선무이고 기존의 유아복 등 부대사업은 계속 하며 또 다른 사업으로 시들지 않는 장미 포장 특허를 개발한 지인과 사업 제휴를 하여 이마트 판매 코너를 확보, 여직원을 교대로 배치하여 꽃 장사를 하기도 하고 신라 명과, 크라운 제과 등 전국 체인점을 가진 제과업체에 케익과 장미의 패키지 상품으로 제안하였으나 성사되지는 않았다.
엔지니어링, 설계 일감 찾기에 사장 이하 전 직원이 뛰면서 작년에 착수한 기술자 파견 용역은 김한필 전무가 주관하여 확대해 나간다.
IMF 여파로 유휴 기술자는 많지만 적정 기술자를 찾기도 만만치 않아 급할 때에는 사장도 기술자 수배와 이력 사항 정리에 직접 뛰어들어 삼성 엔지니어링을 주력으로 SK건설, 지역 난방기술, 대우엔지니어링, 휴먼텍코리아에 15명의 기술자 파견 성과를 올리며 1999년도 매출 및 수익에 큰 몫을 해낸다.
그러나 도원의 꿈은 이것이 아니었다.
엔지니어링 본연의 일로 복귀하는 것, 나아가서 선진 EPC 기술회사의 구축이다.
4) 종합설계 첫 수주의 감동 "삼겹살 – 소주의 향연’
당시엔 그룹 엔지니어링사에 설계 협력 업체 등록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로 삼성 엔지니어링, SK건설에 엔지니어링 협력업체로 등록을 시도하다가 실사 통보를 받으면 비상이다.
손쉬운 대로 동원 가능한 동아 출신 기술자를 불러 자리에 앉히고 물론 설계 일이 있으면 같이 해나가면서 대기 한다
실사 면담 시 사장의 자신감과 거침없는 회사 소개와 사업 설명은 25년이 넘는 국내외 엔지니어링 프로젝트 경험이 뒷받침한다.
삼성과 SK에 종합 엔지니어링 협력업체 등록이 쉽게 이루어진 배경은 SK는 쌍용으로부터 슬러지 소각로 건설 입찰 초청을 받는 시점에 도원은 추후 실시설계 참여조건으로 SK의 사업제안서 작성을 협조하기로 하고 최종 제안서를 제출 하니 SK의 사업개발담당 이광랑 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 아침 임원 영업 회의 시 도원이 작성한 제안서에 대해 칭찬이 많았습니다.
금 후 타 부서에서도 제안서 작성 시 모범으로 삼자는 분위기였습니다.”
비록 일감은 준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도원 식구 모두의 사기와 자부심을 일으켜주는 기분 좋은 소식이었고 한편 삼성 엔지니어링은 한국 가스공사로부터 계룡 LNG 승압기지 건설 설계용역을 수주하였다.
종합 설계 용역이지만 자체 회사 규모에 비해 너무 소규모 용역 프로젝트로 삼성은 당시로선 대소 불문하고 자체 소화 하자는 분위기였다.
도원의 창립 멤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동아엔지니어링 시절 가스 공사 유사 용역에 이력이 난 사람들인지라 절호의 기회이자 절대 절명의 프로젝트로 삼성의 본부장부터 실무자까지 도원의 의지와 경험을 살려 설계 수주를 위해 끈질기게 설득한다.
얼마 후 삼성으로부터 결과가 나왔는데 “도원에 일괄 용역 의뢰하기로 했습니다.”
삼성 담당 과장의 전화 한마디에 모두가 흥분하고 동아엔지니어링을 되찾은 기분으로 작년 7월 사무실 차린 지 꼭 일 년만의 큰 경사였다.
역말 삼겹살과 소주로 이 흥분과 회한을 되새기며 환호하고 암울한 미래를 안고 같은 장소에서 소주로 서로를 격려하던 바로 1년 전 개업 회식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확실한 미래를 그리며 부딪치는 소주잔은 그야말로 “도원결의”를 다지는 북소리 그 자체였고
도원 창립 1년차 5개월은 이리저리 일감 찾아 정착하지 못한 형국이었지만 2년차인 1999년은 이를 계기로 종합엔지니어링의 교두보를 마련한 셈이다.
연초 경영 목표를 ‘회사기반 정립의 해’로 설정한 것이 어떤 형태든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하여 파견 직을 제외한 상근 정규직 7명의 계획이 13명으로 늘어났고 매출 계획 6.6억이 7억 원을 훌쩍 넘기며 99년 초 반쪽짜리 사무실 4층을 전 층(40평)으로 확대한다.
여유가 있어 사무실 일부를 전기, 계장 외주업체에 할애도 하고 99년 말, 같은 건물 3층으로 확대하며 2개 층을 사용하게 된다.
10여 명의 임직원은 모두가 실무자이고 멀티 플레이어의 자세로 사장 이하 전부 상황에 따라 영업, 실무, 관리 업무를 동시에 수행한다.
이렇게 하여 1999년도에 삼성 엔지니어링, SK건설, 지역난방기술, 대림산업 등으로부터 21건의 기술용역 계약을 이루었고 삼 백 만원부터, 삼성으로부터 수주한 승압 설비설계 용역 1억 2천만 원까지 실행 금액의 대소를 가리지 않고 실행에 맞추기 위해 몇 날밤 새우기가 일쑤였다.
드디어 다가온 2000년 개업 3년차로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온 지난 17개월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바빴지만 이제 잠시 회사 현황을 정리해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설정해야 할 시점으로 작년에 이어 2000년 사업 계획의 조직, 사업부문은 그대로 두고 엔지니어링본부와 무역, 부대사업 등을 포함한 관리본부로 2개 본부도 변함이 없었다.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기업이념 ‘신의(信義)’는 이때부터 계속되고 작년 경영 목표가 ‘회사 기반 정립의 해’이었지만 2000년 경영목표는 이를 좀 더 구체화 하여 ‘종합기술용역회사의 기반 조성’으로 삼는다.
반평생 플랜트엔지니어링으로 잔뼈가 굵은 사장 이하 창업 동지들의 재기열망을 나타낸 목표달성을 위해 업 면허 체계를 갖추기 위해 그 해 4월 엔지니어링 진흥협회에 엔지니어링 활동 주체 신고를 하고 연이어 10월 기계설비 전문 건설업 등록을 마치고 명실공이 종합 플랜트 설계회사로 격상하게 되었다.
5) 종합플랜트엔지니어링으로의 걸음마
작년 사업계획을 초과 달성에 힘입어 사업계획규모를 작년 계획의 3배로 잡고 2000년 매출 21억, 연평균 인원 20명을 목표로 한다.
직원들은 ‘너무 과도한 목표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져보지만 중장기 구상과 강한 의지 앞에선 이것도 모자라 보이지만 이제 엔지니어링, 설계 용역의 기본 업 면허를 구비하고 소규모이지만 종합엔지니어링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20명의 임직원을 둔 ㈜도원엔지니어링은 어엿한(?) 종합플랜트엔지니어링 회사의 구색을 갖춘 셈이다.
모기업인 동아 건설마저 IMF의 늪에서 스러져가는 당시 상황에서 기댈 언덕 없이도 장하게 키운 도원 엔지니어링의 드라마와 같은 태동 과정을 일부 매스컴에서 주시하기 시작하여 1998년 8월 기술 월간지 ‘배관기술’에서 도원 창업의 뼈아픈 배경과 창업 직후의 상황을 취재 기사화 한 것이 시초이며 이어서 한국경제, 매일경제 지를 포함한 일간지와 KBS 방송사의 취재 보도가 이어지기 시작한다.
특히 2001년 3월 28일자 한국경제 신문에 1면 톱기사는 특이하다.
‘사장ㆍ직원 모두 퇴출자… 눈물로 일군 성공신화’
기사 제목이 매우 감성적으로 당시 담당기자가 전한 에피소드가 있다.
기사 편집 시 도원의 태동과 성장 과정 원고가 편집국장 눈에 크게 띄어 많은 중소기업이 구조조정과 줄줄이 도산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기사로 지목된 것이다.
“이 기사를 1면 톱기사로 하도록 상신해 보시요!”
1면 톱기사가 나간 후 여러 기관, 업계에서 격려와 찬사를 받았고 어려움에 처한 많은 중소기업에 용기를 준 감동적인 사례로 한동안 회자 되었다.
도원 식구들도 이렇게까지 매스컴의 주목을 받을 줄 몰랐고 더구나 대기업인 포항제철, 삼성 엔지니어링은 사내 교육용으로 영상 취재를 하기도 하였으며 급기야 2001년 4월 7일 방영된 SBS의 ‘눈물로 뭉친 기막힌 사내들’ 이란 프로에 사장이 눈물을 글썽이며 목이 메어 말문이 막히는 장면이 잠시 나오기도 했다.
이렇게 외부로부터의 주목을 받으면서 도원은 종합 엔지니어링 회사로서의 면모를 구축하니 그 당시 동아엔지니어링의 퇴출 이후, 부서장급이 전문분야별로 창업한 회사가 11개 회사가 있었으나 종합엔지니어링으로는 도원이 유일하게 시작되었고 창업 때부터 EPC 종합건설 회사의 비전을 가진 당연한 출발로 창업 3년차인 2000년도에 총 36건의 기술 용역 계약을 맺는다.
2001년 3.28일 한국 경제 1면 헤드라인에 실린 도원의 기사
6) 건설업 진입의 도전 “자! 정면 돌파 합시다!”
2001년 새 아침이 밝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윤사장의 비전은 항상 멀찌감치 눈높이 위로 두고 있다.
새해 벽두부터 선진 중견 EPC로 무장한 도원을 꿈꾸며 소규모 엔지니어링 회사에 머물고 있는 당시의 직원들에게 사장의 미래 구상은 어쩌면 먼 나라의 꿈으로만 생각했을지 모른다.
당연히 경영목표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어 창조, EPC 구축 및 C.I 부각을 경영 목표의 화두로 내세우며 종합건설업 진출의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그 해 11월, 일찌감치 찾아온 추위가 그날따라 더욱 쌀쌀하였고 아직 회의실다운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용호빌딩 지하창고 반쪽 3평정도 되는 좁은 공간에 사장과 간부 임직원 6명이 모였다. 대부분 창업 초기 멤버이다.
그날의 회의 주제는 건설 영업대책이다.
연초부터 건설 진입을 위해 회사 홍보, 사업제안, 견적서 제출 등 각고의 노력을 하였으나 뚜렷한 실적이 없는 상황으로 KAIST가 발주한 9억 원짜리 ‘폐 탄산가스를 이용한 메탄올 합성 파일럿 플랜트’를 턴키로 수행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간단하게 지난 건설 영업과정과 차후 영업 방향을 협의 하던 중 사장은 느닷없이 그리고 단호히 “대전에 건설 회사를 설립하도록 합시다!”라고 제안하니 모두가 잠시 서로를 쳐다보며 놀라워하며 이내 침묵한다.
엔지니어링에 기계 설비공사 업 면허가 있으니 당분간 공사 경험을 쌓은 후 종합 건설사를 설립하자는 건의도 있었으나 사장은 적극 공감하지 않는 분위기다.
“우리가 그간 수차례 홍보하여 왔고 금후 목표로 하는 중견 EPC 건설회사로 가기 위해선 종합건설사 설립이 필수요건이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그간 힘들여 맨바닥에서 회사를 이렇게 키워 왔는데 다시 한 번 합심하여 다 같이 또 다른 새로운 길로 도전해 봅시다.
이렇게 하여 주식회사 도원디테크(현 도원건설)는 2001년 12월 14일 설립되어 대전 서구 둔산동 대전 지방법원 옆 재능 빌딩 8층에 본사를 두어 도원건설그룹으로의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서울의 도원엔지니어링으로부터 도원디테크가 분사되고 자연히 엔지니어링이 건설을 이끌어 가는 선진국 형 EPC 턴키 체제의 기본 수순을 갖추고 창업 시부터 국내외 플랜트엔지니어링 경험을 가진 엔지니어가 주축이 된 것도 선진 EPC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2001년도 역시 전년도와 비슷한 기조로 설계, 기술자 파견, 타당성 조사 등 기술 용역, 기술번역 등으로 37건의 프로젝트 계약 실적을 올렸고 변화가 있다면 계약액이 커진 것과 건당 1억 이상의 종합설계용역 6개 프로젝트를 수주한 것이다.
‘싸이스 여수 열 생산 시설공사 일괄설계’는 창사 후 가장 규모가 큰 4억 가까운 설계용역과 함께 도원은 2001년도에 또 하나 중요한 경험과 실적으로 KAIST와 공동으로 연구 개발하여 Pilot Plant 건설을 턴키로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KAIST는 국책연구 과제의 하나로 지구 온난화에 대비한 ‘탄산가스 이용 메탄올 합성’ 기술을 연구 개발하고 있을 때 도원이 제시하여 KAIST는 합성 기술과 Process Concept Data를 제공하고 도원은 KAIST 자료를 기초로 Pilot Plant의 기본 및 상세설계, 기자재 구매, 건설, 시운전과 초기 운전 정비 서비스를 제공하는 고부가 가치의 용역을 수행한다.
2001년 엔지니어링 실적은 전년도보다 60% 증가한 19억을 나타내고 전문공사 및 기자재 부분공사를 포함하면 전체 목표액 25억을 거의 달성한다.
2001년도 경영목표의 하나인 ‘EPC 종합회사구축’은 소규모이지만 EPC 턴키 프로젝트 실적과 연말 도원 디테크 건설 회사 설립으로 기본 구조를 마련한 셈이 되었고 특히 중소기업청으로부터 ‘2001년도 창조기업인 30명’에 선정된 것은 창업 초창기부터 대외기관, 매스컴의 주목을 지속적으로 받아온 도원의 역동성과 도전, 창조적 변화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2001년 12월14일 대전 서구 둔산동 재능빌딩에서 도원 디테크건설 개업식에
오른쪽부터 정규창 중소기업청장,대전광역시 정무 부시장,필자,곽수정사장과 함께
2001년 2002년 도원엔지니어링이 종합 건설에 진입하여 국내 플랜트 EPC공사에 돌풍을 일으켜 실린 신문기사들
2003년 도곡동 신사옥으로 이전하고 아내와 같이 입주 파티하는 한장면
시대의 영웅
윤 해 균
천박한 산야에
무리의 왕이 되어
당대를 뛰어넘는 기상과
신기 힘으로 종족을 번창 시키고
미래를 꿰뚫는 통찰력과
세계로 향한 명석한 도전 정신을
뿜어대며 민족을 수도 없이 살렸다
높은 지혜와 열정을 퍼 나르던 육신은
탈진하여 이내 누워 있으나
꺼지지 않은 우러름이 있으니
무덤에 아직 흙을 덮지 마라
*아산이 추구한 이상과 근본은
활활 살아 천만 배 확산되어
대를 잇는 다른 영웅들에게
전달되어 더 큰 승리의 원천이 된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운 몸의 유전인자를 내리받고
정신까지 이어져서 부활한 우리가
조국의 번영을 영원히 이어 나가리니
두 손 받들어 우러르라
내려 주신 하늘이여
묵념에서 눈을 뜨니
만년 변하지 않을 낮 익은 산천에
분신 영웅들이 활거하고
찬란한 융성 기운이 꽉 차있다
2004년 충북 오창에 건설한 일본 린텍크 공장( 130억 규모 )
평택 인지 디스프레이 공장 준공모습
7) 첫 번째 공사 수주의 출발
암담함과 환희의 교차’
창사 4년차인 2002년도는 공사 수주를 향한 대장정의 출발시점으로 도원엔지니어링과 디테크건설은 상호보완적으로 연결되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는 구조다.
작지만 강한 EPC 턴키 수행시스템으로 발전되고 엔지니어링에서 건설이 분사된 후 순차적으로 건설 기술자를 보강한다.
자연히 엔지니어링이 선도하고 건설이 따라오는 선진국 형 EPC 수행을 갖추고 2002년도는 엔지니어링, 건설 별도로 사업계획을 구상하며 도원엔지니어링은 당연히 중견업체로서는 국내 제일의 에너지 발전 부문 종합 용역회사를 목표로 한다.
그러나 시급한 것은 건설 일감 확보다.
대전과 서울에 두 집 살림을 꾸려나가려면 일감이 절대 절명의 과제이기 때문으로 4년 전 엔지니어링 창업 시의 초심으로 회귀한다.
“위기는 기회다”, “구하는 자에게 길이 있다.”
수없이 되 뇌이던 말이 또다시 반복되고 실행원가는 따지지 않고 일만 있으면 몸으로 때우던 창업 초기의 설계 용역과는 다른 건설공사는 몸으로 때워서 될 일이 아닌 이유는 건설 자재, 노무비, 경비 등은 반드시 지출되어야 할 현금이기 때문이다.
건설 회사 설립 후 1차년도 매출 목표를 100억 원 이상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수많은 중소건설 업체와 경쟁하기에는 뚜렷이 내세울만한 실적이 없으면서 단지 개인적으로 건설, 엔지니어링 경험이 많은 대기업 출신 기술자 능력만을 부각시키는 것이 단골 메뉴이다.
여기에 사장을 필두로 담당 임직원들은 ‘진돗개 정신’으로 끈질기게 사업주를 설득하며 엔지니어링이 선도하는 건설의 장점도 부각시키며 도원의 드라마와 같은 창업, 성장 과정이 매스컴에 보도된 것도 지명도 향상에 한 몫을 하였다.
이러한 특이한 배경을 안고 도원디테크 건설은 미래를 향한 항해의 닻을 올리고 일반 건설사와 다른 특성을 사업주들에게 소개하자 서서히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여 그 해 1월, 첨단 광소자 개발업체인 Z사와 공장 및 연구동 신축공사를 21억에 계약한다.
연내 준공 계획이므로 단일 계약으로 연간 매출 목표 절반 이상을 달성하는 공사 규모다.
Z사 사장은 첨단산업에 관심을 둔 엘리트 출신이며 IT, 신소재, 자동차 부품 등 첨단 부품공장의 사업주는 대부분 대기업 제조업체 엘리트 임원 출신으로 공장 건설도 합리적인 건설 시스템을 알고 접근하는 건설업체에 호감을 갖는 등 일반 중소건설업체와는 차별화됨을 인식하게 된다.
2002년 건설 영업 초기년도에 12건의 건설 계약 실적을 올리며 K사를 제외하고 수 천 만원에서 17억 원 사이 소규모 공사로 연간 합계 40억 원의 수주로 머물렀지만 향후 도원건설의 발전에 토대가 된 한 해였다.
이렇게 도원은 엔지니어링 부문과 건설부문 2개 법인의 양 날개로 2002년도 한 해를 열심히 뛰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도원은 내부적으로도 여러 가지 변화를 시도한다.
우선 건설관리 기술의 차별화를 위해 건축사와 건설 관리 기술자격(CM- Construction Management)을 겸비한 건축 기술자와 국내외 건설 현장 경험이 풍부한 건설기술사를 영입한고 이들은 기존의 프로젝트관리 기술자격(PMP) 기술사 등 관련 기술자와 함께 ‘D-FAST TRACK 건설관리기술’ 개발에 주역이 되고 선진 중견 건설 기업군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엔지니어링 기반이 굳건해야 하기 때문에 2002년 9월 30일 엔지니어링 부문의 VISION “SUPE-21”을 별도로 선포한 것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다.
동아 때부터 이어온 발전 에너지 분야 엔지니어링 능력의 계승 발전과 소규모 건설 턴키 수행 능력 구축에 목표를 두는 한편, 건설법인을 출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비전 설정을 엔지니어링에 포커스를 맞춘 이유는 엔지니어링이 이끄는 선진 EPC 턴키 구조에 대한 인식과 목표의식을 뚜렷이 하기 위해서였다.
EPC 턴키의 개념은 석유 화학공장, 발전소 등 대형 플랜트 건설에서 유래되었고 도원이 대외에 내세운 ‘One-Stop Solution Technology’, ‘Total Service’ 홍보는 이러한 EPC 턴키 구조의 자신감에서 비롯된다.
한편, 엔지니어링과 건설의 양 날개를 달고 1년차를 비상하고 있는 도원은 외부로부터 인증을 받기 시작하자 도원은 중소기업청으로부터 ‘INNO-BIZ(기술혁신) 기업’으로 선정되고 아울러 기술신용보증기금으로부터 ‘우량기술기업’으로 인증을 받고 도원은 이러한 내ㆍ외부의 강력한 성장에너지를 등에 업고 2003년도를 맞이하게 된다.
2003년도 사업 슬로건은 ‘활성화’에 둔다.
전년도에 시동을 건 턴키 공사 수주와 사업 수행 경험에서 온 자신감으로 건설 매출 목표를 150억으로 잡고 엔지니어링 기술용역 목표 26억을 합하면 176억 원의 매출 목표다.
수주는 최소한 250억 원 이상을 해야 매출목표와 형평이 맞는데 실제 2003년도 수주액은 330억 원을 넘어 목표를 초과한다.
대전, 충청권에 LCD, IT, 첨단소재, 자동차 부품공장 등 신증설 계획과 맞물려 가파른 도원의 성장 신화를 낳기 시작한 도원은 건설 설립 후 2년차 사업 년도인 2003년에 도약을 결정짓는 몇 가지 감격의 순간을 맛본다.
그 해 늦여름 충북 청원 오창 공단에 엔바이오테크 오창연구소 및 공장 신축 공사를 95억원에 수주하고 이는 생산 설비 장비 공급까지 포함한 일괄 도급공사이고 몇 달 후 11월, 충북 충주공단에 LS 그룹 계열 GCI 첨단 케이블 공장을 89억 원에 수주하여 건설업면허내고 1년 반 만에 기적과도 같이 대형공사 2건을 수주한 것은 그 당시로서 거의 신기록에 가까울 정도로 대단한 발전 속도였다.
향후 이 두 개의 공단에 도원이 가장 많은 공장을 수주하게 되는 교두보를 구축한 것으로 도원은 지금까지 오창, 충주 공단에서만 24개 공장을 성공적으로 수주 착공하여 준공하고 특히 GCI 공장은 지역 사회 및 인근 공단으로부터 우수 공장 건물로 지목되어 현장 견학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도원은 건설부문의 탄력에 꿈이 현실로 다가와 기존 용호빌딩 사무실을 이전 확장할 구상을 하게 되어 그 해 11월말, 도곡동 뱅뱅 사거리 옆 동문빌딩 최상층인 6층 전체를 사용하기로 계약 하고 조금 여유 있는 공간은 전기 계장부문 협력업체와 같이 쓰고 이것이 현재 도원 건설 그룹 서울 본사의 시작이 되었다.
용호빌딩 사무실이 낡은 연립주택이라면 동문빌딩 사무실은 대형 새 아파트와 같아 지금 6층 회의실이 당시엔 왜 그리 커 보였는지…
건설부문은 영국 UKAS로부터 ISO9001 인증을 받고 또한 건설품질시스템은 국제 품질규격에 합치됨을 인증 받은 것으로 대외 신인도 제고에 한몫을 한다.
한편 엔지니어링 부문은 2003년 한 해에 39건의 프로젝트를 수주한다.
가스공사, 주택공사, 지역난방기술, 가스기공, 삼성물산건설부문, 삼성 엔지니어링, 도시가스, 애경 등 발주처의 폭이 다양해진다.
특히 한국가스공사로부터 국내 최초의 이동식 NG Gas Compressor 설치공사를 EPC로 수주하여 성공리에 끝내고 핵심 Compressor Package는 미국으로부터 직접 수입하여 설치하였다. 또한 해외용역으로는 애경화학의 베트남 현지 UPR 공장건설 기술용역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도 의미가 있고 해외 진출 공장건설의 엔지니어링 파트너로 일괄 기술 용역을 하여 좋은 평가를 받는다.
탄력을 받기 시작한 건설부문을 위시하여 엔지니어링 영역도 한층 넓힌 2003년도는 사옥 이전과 함께 의미 있는 한 해를 마감하게 된다.
2007년 도원 그룹 회장 및 사장단 취임식 -그당시 같이 일해온 임원과 함께
회장 집무실에서
대성사 목불좌상님에게
윤 해 균
불공을 드렸다
향을 피우고 합장을 하고
눈을 뜨니
금빛 부처님의 환한 모습 뒤에
천지가 밝아온다.
우리의 터전이
더 이상 어두움에 유린당하지 않고
새롭게 생성되는 붉은 일출을 본다
이제 밤이 낮으로 바뀌었다.
밝아진 온 천지는
우리의 우람찬 시작을 기다린다
바닥에서 고개를 쳐들고
박차 오르려는 생명에는
열정이 가득하다.
던져진 운명에서
보란 듯이 달뜨게 살아갈 것을
대성사 목불좌상님께 아뢴다.
8) 도원의 가파른 성장 그 화려함에 빠지다
2003년도 말, 뱅뱅 사거리 이면도로에 있는 새 건물 동문빌딩 6층으로 본사 이전을 마친 도원은 2004년도를 새로운 마음으로 맞는다.
2003년도는 탄력을 받은 사세 신장의 여세를 몰아 사업 슬로건을 ‘활성화’에 두었지만 2004년도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안정화, Stabilization’을 사업 슬로건으로 내세운다.
2003년 11개 프로젝트 300억 원 수주 실적이 2004년도에는 24개 프로젝트 500억 원 수주도 70% 가까이 증가 하고 신축 건물로 본사를 이전한 후 실질적 1차 년도인 2004년도에도 주목할 몇 가지 족적을 남긴다.
도원의 건설관리기법인 ‘디-패스트트랙’이 제 5회 기술대전에 출품되어 산업자원부 장관으로부터 ‘은상’을 받기도 하고 2003년도 충북 청원 오창공단에 대형 공사 수주로 교두보를 마련한 도원은 2004년도에 그 여세를 몰아 오창공단에만 7개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쾌거를 낳는다.
이후 2005년, 2006년 연이어 활발한 충청권 건설 수주의 신화를 굳히는 디딤돌이 된 것으로
특히 오웬스코닝, 보그워너 등 외국인 업체 공장 장비 조달 업무는 향후 EPC 프로젝트 수행을 위한 좋은 경험이 된다.
이렇게 창업 6년만에 번듯한 새 사무실에서 도원은 자신있고 활기찬 모습으로 사업을 펼치고 더 나아가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또 하나의 야심찬 구상을 한다.
이것이 2004년 12월 27일 주식회사 도원 유비큐 (Dowon UBQ Co.,LTD.) 설립으로 현실화되고 동문빌딩 2층에 8명의 연구진과 2명의 관리 요원으로 출발한다.
초기 개발 품목으로 초고 해상도 디지털 카메라폰 부품을 시작으로 모바일 핵심 칩까지 겨냥하며 2006년부터 110억원의 매출을 일으켜 4년 후인 2009년도에 10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야심찬 계획이다.
선발업체인 ㈜코아로직과 ㈜엠텍비전에 비하면 연구원 수 및 개발 투자액 면에서 턱없이 부족하지만 전략 아이템부터 집중 개발하여 조기 사업 매출을 일으켜 순수 투자 비율을 최소화 하고 사업 수익을 재투자하는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이렇게 하여 도원은 기존 사업인 건설, 엔지니어링의 기반과 견실한 사업 신장세를 다지고 IT사업 진출의 선포로 2004년 한 해를 마감하게 된다.
2005년도는 새 사옥으로 이전한 후 두 번째 맞는 해로 특히 외국인 투자 첨단 공장건설 수주가 돋보인다.
일본의 Lintec Korea, Inc. 오창공장과 미국의 Owens Corning 아산공장, 연이어 일본의 파주전기초자(PEG)공장과 독일의 티센메탈즈 포승공장이 대표적인 외국인 프로젝트로 도원은 이렇게 수주환경이 다양화 안정화됨에 따라 그간 소홀하였던 회사 내부 시스템에 눈을 돌린다.
도원은 대외 신용평가 기관으로부터 우수기업으로 평가를 받고 한국 기업평가㈜로부터 ‘신용평가 등급 A+’로 평가 받았고 주거래 은행인 기업은행으로부터 우수 기업 등급은 ‘FAMILY 기업’으로 선정된다.
회사의 규모가 급신장함에 따라 도원은 본사와 많은 현장을 유기적으로 통합ㆍ관리하는 시스템의 필요성을 절감 경리 회계, 견적 등 단위업무에 독립적으로 사용하는 전산 프로그램만으로는 회사의 정보관리에 한계를 느끼고 이를 해소하고자 전사적 자원관리시스템인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 구축에 착수한다.
이렇게 도원은 사세 확장에 따라 내부 시스템을 다지고 탄력 받은 수주 활동을 체계화하여 내ㆍ외부의 균형 잡힌 중견 건설 그룹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수주 실적도 안정적으로 성장하여 건설 623억 원, 엔지니어링 50억 원을 수주하여 전년도에 비해 30% 내외의 신장세를 보였다.
특히 건축사사무소는 4월에 별도 법인으로 독립하여 첫 해 8개월간 12억 원의 수주 실적을 올린다.
한편 전년도 2004년 말, 닻을 올린 도원 유비큐는 순차적인 절차를 밟는다.
3월 기업부설연구소 설립에 이어 6월 ISO9001 인증을 받고 7월엔 벤처기업으로 등록하는 등 IT 개발 사업을 위한 기초 작업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생소한 IT 사업 추진에는 여러 가지 취약한 부분이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IT개발 특성상 투자비가 눈덩이처럼 누적되어 고심 끝에 그 해 11월 야심찬 도원 유비큐의 출범은 닻을 내리게 된다.
IT업 진출시도는 도중하차 하였지만 도원은 기존 사업 분야의 순항으로 연말에 희망에 찬 비전 발표회를 갖는다.
2005년 말, “VISION TOWARD 2008”을 선포하고 발표회를 갖는 동시에 ‘100년 컴퍼니’ 로고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2005년 680억 원의 총 수주 실적을 올리고 2006년에 급기야는 가파른 성장과 함께 수주 총액이 2300억을 달성하여 전년대비 350%의 경이적인 실적을 올리게 되었다.
따라서 임직원 수도 200명을 넘어서고 본사 사옥인 동문빌딩 6층만 쓰다가 6개 전 층을 다 쓰게 되어 바야흐로 중견기업으로의 면모를 갖추고 해외 사업 및 각종 신규 사업을 문어발형태로 확대하니 중국과 베트남에도 지사가 설립되고 분당 판교 테크노밸리에 12층짜리 새로운 본사건물을 구상하여 토지매입하고 2010년 입주를 목표로 하였다.
2007년에도 지속적인 성장과 함께 계열회사도 6개로 늘어나고 임직원수도 250여명에 육박하여 판교 신규 사옥에 입주하는 2010년에 맞추어 2007년 12월 Vision-2010을 구상하여 서초동 국제 전자센터 23층에서 각계인사와 임직원 과함께 Vison -2010 발표회와 기념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후기
2008년 7월 도원그룹 창립 10주년을 맞이하여 성대한 기념식 계획과 함께 도원그룹 10년사 편찬을 기획하고 도원의 태동과 성장기록을 자료를 찾아가며 작성하는데 수고하신 애드뱅크의 윤사장님 그리고 백혜진 여직원에게도 감사 드립니다.
2008년 2월 도원건설 용인 분소에서- 글쓴이 도원 엔지니어링 전무 김한필
2007년 말 시행한 2010비젼 선포식에서
2006년 용인 동경 일렉트론 공사 기공식에서- 당시 손학규 경기도지사와
3) 감성 건설 경영에 시를 입히다
4) 회장의 하루 일과와 건설현장 일기
5) 기업인 대표로 평양 방문기
6) CEO 회상
7) 지루한 법정다툼의 결말
위를 향하여
윤 해 균
넘어져 일어날 때에는
쉬운 일이 아니다
벌떡 일어나 비상하라
떨어지면 죽는다는 각오로
힘 있는 날개 짓과 함께
걸어온 길을 잊고
또 넘어져 땅을 파고 묻혀도
험난한 주변을 탓 할 것 없다
내발로 걸어 온 길
안 가고 안 만나고
천천히 돌아가면 될 일을
이제는 꾸물거릴 사이 없이
똑바른 길을 나서야한다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이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에는
어렸을 때의 열정보다 더 헐떡이며
벌써 큰방 같은 그리운 자리 일 것이다
설렘과 두려움 그 어느 것도
생각만큼 커져있을 뿐이다
밝은 눈으로 보아 나쁠 것 없다
버려야 할 것을 구차하게 끌고 다니는
넝마 사상을 버리고
양손을 술의 축에서 놓아
반듯이 목표에 향해있어야 한다
5-2-2 도원의 창업 정신과 도전의역사
제 2장 선진 중견 건설그룹으로의 발돋움
■ 엔지니어링 기술이 이끄는 선진국 형 건설 턴키 시스템
건설 수행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분리형과 일체형으로 분리형은 설게, 시공을 따로 발주하는 것이고 일체형은 EPC 즉 풀 턴키로 공사를 한 회사에서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선진국형 수행방식이다.
당시 단순 시공 위주의 국내 건설 관행은 비효율성과 후진성인 분리발주가 대부분으로 만연되었으나 복잡한 플랜트 공사에 있어 적용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선진 건설관리 기술이 단순 시공 기술보다 공기, 비용, 품질 등에서 더 큰 영향력이 있으나 사업주는 설계 따로 시공 따로 분리 발주하는 관행이 있었다.
대부분 자체 공사 관리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분리 발주가 공사비 절감을 가져 온다고 믿고 건설사를 믿지 못하는 세태에 이를 설득하는 데에는 어려운 전문 용어보다 쉬운 말로 이해를 시켜야 한다.
‘왜 공사비와 공기 절감이 되는지?’
‘왜 사업주 입장에서 공사 관리가 단순하고 편리해지는지?’
그리고 시공사와 설계사와의 책임 한계가 불분명할 경우 분쟁과 잦은 설계 변경으로 공기와 공사비 손실이 막대함을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도원의 설득으로 분리 발주를 일괄 턴키로 방침을 바꾼 사업주가 있는가 하면 기존 설계를 도원이 전면 재검토 하고 시공을 맡기는 사업주도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도원은 자체 건설관리 기법을 정립할 필요성을 느껴 임직원 중 이 방면에 이론과 실무를 갖춘 기술 자격자를 통해 프로젝트 관리 기술자(PMP)와 건설관리기술자(CM)의 주도로 도원의 특화된 건설관리기법 ‘디-패스트 트랙(D-TAST TRACK)’이 탄생한다.
이 공법의 타당성이 인정되어 2004년도에 중소기업청에서 주최한 ‘제 5회 기술혁신대전’에서 산업자원부 장관상인 ‘은상’을 수상한다.
연이어 이 공법으로 2005년도에 행정자치부가 주최한 ‘신지식인 선정’에 중소기업 분야로 윤해균 회장이 선정되기도 한다.
도원의 건설 턴키 시스템은 몇 가지 특징은 도원엔지니어링, 도원건설, 인지건축사사무소의 3개 건설 관련 법인이 건설 턴키 시스템의 3각축을 이룬다.
기획, 조사, 설계, 구매, 시공, 시운전, 유지관리에 이르기까지 일괄 턴키 건설 과정에서 각 사의 전문기술과 서비스 영역은 상호 연계 통합(Integrate System)되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턴키 프로젝트의 수많은 정보는 3사가 유기적으로 교류되어 공유한다.
독단으로 정보 흐름이 정체되지 않도록 시스템화 되어 정보 정체가 가져오는 중대한 손실은 모두가 인식하고 기술자도 상호 교류한다.
건설영업과정에서 엔지니어링, 건축사 기술자가 합류하여 기술 영업 지원을 하여 건설영업
대화의 화두가 사실상 설계, 기획, 조사 부문이 더 많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유연한 조직 운영에다가
역동적이고 순발력 있는 도원의 일면을 나타낸다.
■ 도원의 차별화 기술 및 서비스
1) 중소 건설용 EPC
EPC 턴키 체제를 중심으로 엔지니어링, 건설, 건축사사무소의 삼각 축을 구축한 도원건설그룹은 유연성과 순발력에서 타 회사보다 앞장서고 프로젝트의 중요성과 시급성에 따라 적기에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겉보기에는 별도의 회사이지만 EPC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는 전문성을 가진 부서 단위가 된다.
삼각 축은 상호 보완하여 턴키를 위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며 중견 건설업체로서 LCD 등 IT, BT, ET, 자동차 등 첨단 부품, 소재 공장을 가장 많이 건설한 것도 이러한 시스템이 효과적으로 가동된 결과다.
여기에 선진 건설관리 기법이 필수적으로 도원은 ‘디-패스트트랙(D-FAST TRACK) 공법’을 자체 개발하여 모든 건설 프로젝트에 적용한다.
개별 시공기술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건설관리기술이 프로젝트 성공에 더 큰 영향을 줌을 잘 알기 때문이다.
‘패스트 트랙’ 공법은 오래 전부터 구미 선진국에서 건설 공사에 적용하여 온 관리기법으로
원자력 발전소, 석유화학공장, 대형인프라시설 등 복잡한 대형공사에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그간 건설 관행은 설계-입찰-시공 순으로 따로따로 분리하여 시행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으나
패스트 트랙은 이러한 순차적 방식(Sequential Method)을 중첩방식(Overlap Method)으로 함으로서 공기 단축과 공사비 절감을 목적으로 하고 시공단계별 설계가 끝나기 전에 시공의 일부 작업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 방식 적용에도 위험요소는 설계와 시공의 의견 합치와 시공정보 공유가 중요하다.
뒤늦은 불가피한 설계 변경으로 이미 시작된 공사를 헛되게 하여 막대한 이중 작업 비용, 공기 연장 등 피해가 따르게 된다.
도원은 대기업에서 이러한 패스트 트랙 적용 공사 경험을 가진 다수의 간부 직원으로 구성되어 있어 이 공사 관리 기법의 이해와 적용이 용이하였다.
도원은 이러한 선진 패스트 트랙 공법을 중소 건설 현장 실정에 맞게 자체 개발하여 EPC 턴키 공사에 적용 대형 공사 패스트 트랙에 적용한 수많은 요소작업(Activity)을 유사 작업 군으로 압축, 단순화하여 중소 공장 규모에 적합하게 개발한 것이 ‘디-패스트 트랙’ 공법이다.
물론 프로젝트 수행 시 마다 개선 사항은 피드백하여 공법을 업그레이드 시키며 건설, 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3사의 유연한 삼각체제(Triangle System)로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면
15% 이상의 공사비 절감과 30% 내외의 공기 단축 효과를 나타낸다.
지금까지 외국인 투자 공장을 위시하여 EPC 턴키로 수행한 56개 공장 건설 프로젝트에 디-패스트 트랙 공법을 적용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고 한마디로 디-패스트 트랙 건설관리기법은 중소 규모 턴키 건설 공사의 계획, 설계, 인허가, 구매, 시공의 각 건설 단계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기술적으로 통합 연계 관리하여 공기 단축 및 공사비 절감을 도모하는 기법으로 고객 만족을 향한 도원의 발상이다.
2) Dofter Service
또 다른 도원의 기술 특화는
계약의 하자 보수 기간이 지나도 고객의 불만족 사항이 없는지 살핀다.
이는 한 번의 고객은 영원한 고객이며 도원의 이미지를 전파하는 전도사로 여기기 때문이다.
도프터 서비스 (DOFTER SERVICE) 시스템도 이러한 고객관리를 위해 운영되어 도원의 A/S 팀은 하자보수기간이 지난 현장을 6개월에 한 번씩 방문하여 고객의 불만 사항이 없는지, 있으면 무료로 보수를 해준다.
이러한 고객관리에 대한 신뢰는 도원에 증설 공사를 수의로 맡기는 것으로 되돌아오기도 하여 고객이 다시 찾는 도원 이미지의 일면이다.
물론 모두가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까다롭거나 다소 불합리한 고객이 있더라도 도원은 끝까지 인내하며 설득하고 합의점을 찾는다.
3) Fusion Engineering
미래 건설 환경은 건설에 IT 등 첨단 기술을 융ㆍ복합하여 건설 프로세스를 혁신시키고, 유비쿼터스 건설시장(U0건설시장)이 성장세를 지속시킬 것이다.
유비쿼터스 기술과 서비스로 기술의 고도화와 안정화를 도모 건설 현장이 자동화되고 공정관리프로그램이 정착되며 모든 작업이 데이터화 된 첨단 IT 기술을 건설관리에 접목시키는 U-건설관리기술로 건설 프로세스를 혁신시키는 것이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은 국책 사업의 하나로 건설기술과 관련된 NT, IT, ET 등 첨단기술을 중점 육성하여 건설기술에 응용하여 건설기술혁신 및 신기술 창조를 촉진하는 첨단 융합건설기술(Technology Fusion of Construction) 인 것이다.
이와 더불어 첨단융합건설시장(Convergence Market)이 미래 건설시장의 블루 오션으로 대두되는 U-건설시장으로 대표적인 예가 U-시티 사업이다.
건축, 교통, 통신, 에너지, 환경 등을 복합적으로 융합하고 주거, 상업시설, 오락시설, 오피스, 학교 등을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입체도시 형태로 다양한 분야의 요소 기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다.
이 기술들을 유기적으로 얼마나 잘 조화시키느냐가 성패를 좌우하며 건설과 IT가 손잡고 유ㆍ무형의 결과물을 창조하는 종합예술인 셈이다.
우리나라도 삼성, GS 등 그룹차원에서 U-시티 사업을 대비하여 출자 사들과 협의회를 구성하는 등 행보를 보이고 있어 이러한 미래 건설 산업 구도를 이미 읽고 퓨전 엔지니어링(Fusion Engineering)을 화두로 꺼낸 것이다.
선진 중견 건설기업군으로 성장한 도원은 미래 1군 건설회사의 비전을 실현시키기 위해 첨단 융합건설 기술은 당연히 구축해야 할 도원은 타 회사보다 유사 첨단 공장건설 실적을 많이 쌓은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며 더구나 엔지니어링 기술이 선도하는 건설사업 구조와 건축물을 종합 예술 작품으로 조화시키는 건축사사무소가 한데 어울려 도원의 창의와 역동성을 뒷받침한다.
도원은 미래지향적 건설 사업을 우리나라보다는 해외로 눈을 돌리고 베트남, 우즈베키스탄의 첨단공단과 배후 도시 건설 사업을 추진한다.
첨단 퓨전 기술과 자본의 협력체제도 병행 본격적인 해외 진출과 미래지향 건설의 양면 효과를 추구하며 첨단 기술과 자본의 협력시스템 미래 첨단융합건설시장 진입에 축을 이루는 중요한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도원은 국내 U-시티건설 등 블루오션 건설시장에 당당히 진입할 역량을 쌓아가고 있다.
■ 매스컴, 동종업계의 주목과 경이의 눈길을 받으며…
가장 열악한 경제 환경에서 그것도 기댈 곳 없는 무지공처에서 출발한 도원…
그 드라마틱한 성장과정은 신문, 방송, 동종업계 등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창업 당시 IMF 외환위기 여파로 온 나라가 회사부도, 실업 사태로 넋을 잃고 있을 때 도원의 태동은 희망의 등대로 비춰진 것이다
이때부터 도원과 비슷한 시기에 창업한 동종업계 ‘휴먼텍코리아’와 비교 보도되기 시작한다.
휴먼텍은 삼성 엔지니어링에서 분사한 회사다.
그러나 모회사로부터 3년간의 보육 기간 동안 일감 특혜를 받고 출발하였고 기댈 데도 모회사도 없는 도원과는 비교가 안 되는 여유 있는 출발이다.
그러나 외부의 눈은 도원이 휴먼텍 뒤를 쫓는 다크호스로 2002년 3월 18일자 조선일보(중부판)에 ‘공장신축 내가 더 적임자’에서 ‘디테크 VS 휴먼텍 각축전’ 제목의 기사가 보도되기도 한다.
그 후 내내 대우엔지니어링, 휴먼텍과 더불어 도원은 선의의 라이벌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2005년도에는 충청권에 LCD, IT, 첨단 부품공장 등 신 증설이 붐을 이루기 시작하여 사전 EPC 턴키 체제로 준비된 도원은 이러한 첨단 공장 건설에 두각을 나타낸다.
현재까지 중견건설업체로서 첨단공장 최다 건설실적을 보인 것도 이렇게 앞을 내다보고 준비한 결과다.
또한 전년도의 2배가 넘는 1500억 원을 수주 대전권에서 계룡건설 다음인 2위의 계약실적을 올린 것이다.
한편 도원은 외국인 투자 첨단 공장건설 실적에서도 단연 중견 건설사를 멀찌감치 뒤로 하고 앞서 나간다.
도원의 질주는 그치지 않는다.
건축사사무소를 법인화하여 3개 건설 관련 기업군으로 EPC 시스템을 더욱 다진 도원은 2006년도에 건설부문만 2000억 원이 넘는 수주 목표를 초과 달성한다.
이렇게 도원은 외부기관, 매스컴, 업계로부터 끊이지 않은 관심과 애정, 때로는 경이의 눈길을 받으면서 성장해 온 것이다.
이제 초일류 글로벌 명품기업을 향한 도원으로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향후 10년에도 외부로부터의 찬사와 애정 어린 눈길은 계속될 것이다.
都元의 땅
畵家 詩人 토현 문성환
도곡동 뱅뱅사거리 안엔
날마다 복숭아꽃이 피는 하늘 문을 열어놓고
비바람 눈서리 녹여 삶을 꽃피우는
도원의 땅 산과들에는 바다가 보이고
강이 흐르는 사랑 터와 숲이 있다
景明風을 안고 농사짓는 복음
백팔 음율을 연주하는 사나이
尹 詩人은 오늘도 天文을 열고 있길래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의 음악을 작곡하는
하얀 공간 속에 五色음율을 고르는 중
豊雅의 연두선율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흙 속에서 일어나 하늘로 꽃피우는 사랑을 안고
우리의 얼이 솟는 백두대간처럼
획을 그는 尹 詩人의 목소리에
점점 무성해지는 청정 천년 숲의 평화가 보인다
참 사랑이여 삼색 태극기여
용솟음치는 건설의 소리여
하늘 높은 맥을 담아둔 거룩한 삶이여
영원 하라 영원 하라
하늘 깊은 님의 목소리 울려온다.
2008.5.22 韻氣 속에서
景明風(경명풍) : 동남풍이며 곡식이 잘되는 바람
天文(천문) : 심오한 하늘의 뜻
2002년 뉴질랜드 가족여행에서
1996년 우수사원 해외여행지 호주시드니에서
■ 이웃과 함께하는 나눔 경영과 사회 정의 실현
신의(信意)…
창업 이래 일관되게 유지해 온 도원의 경영이념이다.
초창기 도원 식솔 거느리기 힘겨운 상황에서도 기업 운영의 뜻을 항상 높은 곳에 두고 초기 먹고 살기 바쁜 와중에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항상 화두에 올린다.
당시 내 배가 고픈데 남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을 때라 직원들은 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잘 나가는 회사의 나눔 경영, 사회적 책임 경영 수준이 아닌 아주 조그마한 것부터 실천한다.
기술 번역, 유아복 땡처리 등 마구잡이로 아무 일이나 하던 시절…
번역 일이 날밤을 새워도 완성되지 않으면 급히 외부 기술자의 도움으로 납기를 맞출 때 외국어에 능한 실직자가 많아 쉽게 사람을 구하여도 남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이 여기서도 나타나는 것은 몇 푼 안 되는 번역료는 외부 번역 인력에게 우선 지불한다.
직원 월급도 제대로 없던 시절로 어떤 때에는 번역료 이상으로 지불하여 받은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다.
또한 땡 처리 후 남는 유아복은 더 팔 수 있을 법도 한데 아파트 부녀회를 통해 선뜻 불우이웃 돕기에 기부한다.
초기에 퇴출 후 직장을 구하지 못한 옛 직장 동료들이 찾아오면 우리는 여느 때와 같이 누구나 반갑게 맞이하여 주머니의 잔돈을 털어서라도 삼겹살-소주로 위로도하고 옛 정을 나누며 도원의 비전을 자신 있게 전달한 것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새로운 희망을 주기 위해서다.
이렇게 알게 모르게 조그마한 것부터 실천해 온 더불어 사는 상생경영, 나눔 경영의 정신은 도원이 신장됨에 따라 구체 화 되기 시작한다.
도원의 경영 이념인 ‘신의’는 모든 것으로 통하는 의미로 모든 갈등은 신뢰 부족에서 온다.
고객과의 갈등, 협력사와의 갈등, 이웃 지역 사회와의 갈등, 사내 부서 간 갈등은 회사 업무와 관련된 갈등이다.
가정, 친지, 국가 간 갈등도 대부분 신뢰 부족이 원인으로 도원은 신뢰를 받으려 하지 말고 먼저 줄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도원이 취하고 있는 회사 운영의 기본 가치이자 이념으로 고객과의 신뢰관계는 기업 운영의 절대 절명의 과제이다.
이와 같이 도원은 고객에 대한 신의는 각별하고 특히 쌍방향이 아닌 일방적인 신뢰로 시스템화한 DOFTER SERVICE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도원은 사회 정의 실현을 내부적으로 제도화 하여 2004년 7월 1일, ‘윤리강령’을 제정 선포하고 정도 경영 실천의 기본 지침으로 신의, 성실, 공정거래, 고객만족, 환경 친화의 화두로 임직원과 협력사가 지켜야 할 기본 윤리를 담고 있다.
그 해 11월 1일, 윤리경영실천 규정을 제정 시행 감사실과 ‘클린신고센터’ 운영으로 각종 비리 제보 시스템을 둔다.
아울러 비리 발생시, 구체적 상벌 규정과 신입 직원의 청렴서약, 협력사의 청렴 입찰/계약 서약 등 구체적 윤리 실천 규정을 정하여 비리, 부조리 발생의 소지를 차단시키고 있다.
도원은 지역사회, 이웃과 함께 하는 이웃사랑도 세심하게 배려하여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소박한 실천은 충북 보은군에 서울 보은 병원 건설과 연관하여 보은군과 불우이웃돕기 행사를 유지하여 보은군내 18세 미만 소년소녀 가장 3명과 결연을 맺고 매달 생활비를 돕고 있으며, 보은군내 수한면과 일사일촌(1社 1村) 결연을 맺어 지원하고 있다.
또한 서울 본사 인근 은광여고의 불우 학생에게 학자금을 지원도하고 사회 복지 공동 모금
회와 대한적십자 사업 후원회를 통해 매월 일정 지원 금액을 전달하였다.
이웃과 함께 하는 사회정의 실현에는 협력사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건설 하청, 설계 협력사는 도원의 분신으로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 발생 할 수 있는 애로와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하고 협력사와의 상호 신뢰 관계없이는 성공적인 프로젝트를 하는 것은 하나의 요행을 바라는 것과 같다. 그래서 매년 우수협력사를 포상ㆍ격려하는 것도 이러한 신뢰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함이다.
도원은 이러한 나눔 경영, 정도 경영을 통한 사회 정의 실현에 더욱 높은 뜻을 두고 체계화 시키고 국가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규정하는 ‘ISO 26000, Social Responsibility’를 2009년도에 도입하여 도원이 지향하여야 할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지켜 나갈 것이다.
■ 도원가족을 내 가족처럼…
도원은 곳곳에 감성이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감성의 뿌리는 창업 초기 어려운 환경을 이겨낸 가족 같은 동지애로부터 출발한다.
주머닛돈을 털어가며 소주-삼겹살로 용기와 희망을 북돋았던 그때부터 우리의 감성은 보이지 않게 회사 운영에 스며들어 감성경영의 화두를 꺼내지 않더라도 도원은 이미 감성경영을 하고 있는 셈이다.
감성경영은 정서적인 행복감은 신의와 애정을 기초로 하고 신의와 애정은 가족 같은 끈끈한 동료애로 더욱 두터워진다.
도원은 매년 2회 주기적으로 그룹사별 워크숍과 비전 발표회를 갖으며 한마음으로 단합하고 미래 비전을 공유하기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자연 속에서 한데 어울려 운동경기, 팀 별 과제발표, 비전 발표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한마음이 된다.
이렇게 가족 같은 회사 만들기를 향한 도원의 세심한 노력은 여러 가자 행사 및 복지 제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워크숍, 비전 발표 외에 수주 포상, 공로 포상, 직무교육, 외국어교육, 각종 아이디어 공모 등은 회사 업무와 연관되어 시행된다.
외국어 교육은 영어, 일어, 중국어, 베트남어를 대상으로 하고 원어민 강사, 외부 전문 강사, 직원 강사 등 다양하게 운영하고 직무와 관련된 외부 전문기관 교육은 전액 교육비를 지원한다.
수주 포상은 정보 제공자부터 수주 공로자에 이르기까지 기여도에 따라 포상하고 직원 전체가 영업맨이 되는 이유인 것이다.
연말에는 근무유공상, 경영성과상, 도원인상, 수주대상, 안전인상, 준공상, 장기 근속상으로 나누어 정기적으로 포상하고 기획경영회의에 하급직 직원을 순번으로 참여시키는 것도 도원가족 만들기의 일환이다.
사내에 ‘책ㆍ책ㆍ책’ 코너를 두어 직원 누구나가 책을 대여하여 볼 수 있게 하고 독후감을 제출하는 직원은 모두 상품권으로 포상하여 독서 습관을 장려한다.
출산장려 제도도 비중 있게 다루어 유급 휴가 외에 아기가 두 돌이 될 때까지 월 10만원의 보육비를 지급하고 아울러 원하면 2년간 보육 휴직을 할 수 있고 휴직기간은 근속 년 수로 인정 하는등 그 당시로 보면 작금의 인구출산 감소로 볼 때 파격적인 정책 이였다.
또한 재직하는 동안 출산한 아이는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학자금을 지원한다.
도원은 직원의 건강관리에도 각별하여 개인이 부담하기에 만만치 않은 종합정밀 신체검사를 임원급부터 시작하여 부장급 이상으로 확대하여 매년 회사 부담으로 시행하고 계약은 회사가 하고 수혜는 직원에게 돌아가는 기업단체보험에도 가입되어 있다.
또한 사내 동호인끼리 친목 활동을 적극 권장하고 지원 6개의 사내 동호회로 인라인, 산악, 사진, 축구, 낚시, 외국어 모임이 있었고 도원의 방침은 전 임직원을 망라하여 1 인 1 동호회를 갖기를 권장1 인 당 매월 활동비로 2만원씩 지원하였다.
금연 운동도 빼놓을 수 없는 도원의 건강관리 과제로 수시로 금연 캠페인을 통해 금연자에게 50만원을 포상하고 금연 실패자에겐 벌과금 제도로 50만원 반납과 함께 20만원은 벌과금으로 추가 부담시켜 영구적인 금연을 유도한다.
이 외에도 사내 스마일 콘테스트, 환경 미화의 날, 출근 아침인사, 아이디어 공모 등 이벤트 행사를 수시로 마련하여 우수자에게는 포상하고 도원 가족의 감성적 유대감을 높이고 도원 인트라넷 ‘쉼터게시판’은 직원 개개인이 자신의 의견을 도원가족에게 알리고 싶을 때 좋은 친구로 건전한 제안, 덕담, 의견 교환 등 도원 식구 모두의 격의 없는 대화 마당이 된다.
도원 가족을 내 가족 같이 보살피고자 하는 의지는 시스템이 살아 움직여 서로 아끼고 보살펴야 하는 단계을 넘어 외형적인 최고의 복지 외에 또 하나로 가족이 보고 싶어 퇴근을 기다리듯 도원 식구가 보고 싶어 출근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도원이 되는게 꿈인 것이다.
2004년 중원산업단지 건설 기공식에서 도원 회장 재임10여년동안 200여개가 넘는 공사를
수행하여 전국에 도원이 지은 건물과 공장이 도시마다 수도없이 많고 아마도 200번 넘게
공사시작전에 기공식 그리고 끝난후 준공식을 참석하였다
베트남 하노이 북부 하남성에 400만평 한국 공업단지 조성사업의 L/I를 베트남 정부로부터 받고
기념으로 하남성장과 고위공무원의 본사 방문 기념사진 - 2007년 10월
(주)도원디테크 대표 윤해균
사업 다각화 시키는 창조력이 발전의 힘
2005년 매일경제 신문 스크랩
건설시장의 침체가 심각한 수준이다. 신행정수도 이전 위헌 판결로 인해 충청권 건설경기가 급속히 얼어붙기 시작해 종합부동산세의 시행을 앞두고 완전히 얼어버리려는 조짐마저 보인다. 이러한 침체된 건설시장 속에서 엘리베이터 상승과 같은 초고속 성장을 보이는 (주)도원디테크 윤해균 대표에게 초고속 성장을 이룰 수 있던 원동력과 건설시장의 문제점, 2005년 건설시장의 전망을 들어본다.
(주)도원엔지니어링은 중소규모 공장을 설계·시공해 주는 업체이다. (주)도원엔지니어링의 뿌리는 동아건설 계열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너지, 석유화학, 발전소 및 산업설비 등 플랜트와 토목, 건축, 환경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종합 엔지니어링과 종합 건설을 25년간 수행하여온 국내 유수의 동아건설이 흔들리자 1998년 윤해균 대표는 동아출신을 중심으로 유능한 기술자들을 모아 (주)도원엔지니어링을 설립하였고 그 이후 사세확장과 건설기술을 특화하여 도원엔지니어링의 일부기능을 분사 2002년 12월 종합건설업체인 (주)디테크건설을 설립하였다. (주)디테크건설은 모회사격인 도원엔지니어링의 대전·충청권 사업을 위해 분사형태로 설립됐다.
그 후 (주)디테크건설은 2004년 1월1일부로 자본금 12억원으로의 증자와 함께 (주)도원디테크로 사명을 변경했다. (주)디테크건설과 (주)도원엔지니어링, 이 두 회사의 합병을 계기로 (주)도원디테크는 ‘제2의 창업’을 맞이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타의에 의해 '퇴출'이라는 쓰라린 아픔을 갖고 모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사원들의 회사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 (주)도원디테크는 112명에 달하는 임직원들의 애사심과 팀워크를 바탕으로 하여 ‘패스트 트랙(FAST-TRACK)’이라는 선진화된 공법을 도입하고 있다. 패스트 트랙이란 원래 고속도로의 추월선을 의미하지만 설계·건설 분야에서는 사업주를 대신해 부지선정, 기획, 허가, 설계, 시공을 동시에 수행하는 일괄수주사업 방식(EPC)을 일컫는다. 이는 턴키방식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첨단 공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벤처공장을 턴키방식으로 설립해 주는 일괄수주공사 사업을 시작한지 2년 만에 이 분야의 선두업체로 올라섰다.
윤해균 대표는 "패스트 트랙 공법은 품질향상과 공기단축은 물론 공사비도 15∼20%까지 절감할 수 있어 선진국과 국내 대기업에서 이미 도입해 사용하고 있는 공법"이라고 설명한다.
(주)도원디테크는 그간 국내와 해외에서 수많은 실적을 쌓아왔다. 일본 도요엔지니어링이 말레이시아에 세운 연 90만톤 생산규모의 에틸렌 플랜트 건설에 참여했으며 미쓰비시가 파키스탄에 세운 PVC 플랜트를 수주받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농심의 평택 식용유저장터미널, 대림산업의 부산 가스LNG플랜트, 삼성엔지니어링의 폐수처리설비 등 12개의 플랜트를 완공했다.
그리고 일본 산코엔지니어링과 기술업무를 제휴했으며 미국 카이저엔지니어스와도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지난해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공동으로 메탄올합성 시범공장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기술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또한 3년 전부터 플랜트기술의 우수성을 활용 보완하여 최근 활황세로 일고 있는 반도체 IT, BT관련 설비의 공장 및 건물관련 설계 및 시공에 접목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둬 업계에 주목을 받고 있다.
또한 (주)도원디테크는 최근 와이드 청주오창공장, (주)홍삼바이오텍 홍성 공장동 및 사옥 외 다수의 턴키 공사를 수주하고 있으며 지난 10월 켈리포니아 얼반시에 미국 법인인 DOWON CORPORATION/ USA 설립하여 미국 신기술 협약은 물론 첨단 플랜트 기자재 AGENCY 업무와 합작선 구축 및 다양한 사업을 펼칠 예정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신기술개발과 회사신장을 위해 대전에 기술연구소와 플랜트기자재 제조공장을 준비하고 있으며, 연관사업다각화의 일환으로 자체 성장산업의 구축 및 운영을 계획하고 있다.
한편 원해균 사장은 2005년부터 원수명 전무를 부사장으로 진급시켜 도원엔지니어링의 공동책임자로 선임했다. 이번 인사조치는 회사를 책임경영체재로 전환하여 국내 선두를 달리는 엔지니어링사로 거듭나기 위한 포석이라고 원해균 사장은 설명한다.
다각도의 다양한 사업을 추진중인 (주)도원디테크는 특화된 기술로 우량기술기업 산정(기술신용보증기금), 창조기업인상(중소기업청), INNO-BIZ기업선정(중소기업청)되는 등 건강하고 강한 건설회사로 자리매김 하였다.
동아인들이 만든 성공
98년 5월말 IMF 외환위기로 정부의 대대적인 구조조정 작업이 있었다. 그 일환으로 국내 굴지의 엔지니어링 업체였던 동아엔지니어링의 퇴출작업이 있었다.
따라서 380여명에 달했던 동아엔지니어링의 직원들이 졸지에 실직자로 전락했다. 더구나 노조위원장의 자살은 각종 언론에 떠들썩하게 보도된 바 있다.
사업개발부장으로 퇴직한 윤해균 대표는 “동료들의 어려움을 구경만 할 수 없었다”며 “창업 후 4개월간은 직원들 월급도 주지 못했고, 돈을 버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엔지니어링 사업을 잠정 중단하고 직원들과 길거리에서 옷 장사를 하기도 했다”고 당시의 고난에 대해 언급한다.
또한 직원들에 대해 “일반 및 건설기계를 비롯, 화학장치설비, 소방설비, 전기설비, 공기냉동설비, 산업안전, 품질관리 등 전 분야에 걸쳐 기사 1, 2급 및 기술사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을 정도의 고급엔지니어들”이라며 “그때의 고생으로 인해 모두가 밤낮없이 하나로 뭉쳐 일할 수 있었으며 그 덕에 IMF위기가 오히려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 고마운 기회가 되었다”고 윤해균 대표는 환하게 웃는다.
분배 위주의 정책 내수경제 못살려
건설경기가 내수 시장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현재 내수경기는 갈수록 악화되어 가고 있다.
“2005년도 건설경기가 침체일 것이라는 점이 더 문제입니다. 건설부분은 일정한 성장률을 보이게 마련인데 근래에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정부가 관공사를 일시적으로 많이 푼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윤해균 대표는 그때그때 위기를 벗어나려는 정부의 한시적인 해결 방안에 대해 실망하고 있었다.
“일시적 투자로 재투자를 이끌긴 힘듭니다. 장기적인 해결방안이 필요합니다. 자본이 있는 투자자가 투자할 수 있는 환경요건을 만드는 것이 제일 시급합니다.”
현 정부의 정책방향에 대한 발언도 윤해균 대표는 빠뜨리지 않았다.
“현 정부의 정책을 보면 성장위주의 정책을 포기한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현 정부는 성장과 분배란 두 마리의 토끼를 한번에 쫓고 있기 때문에 한 마리의 토끼도 잡기 힘든 겁니다. 종합부동산세 같은 법적 제도는 투자자의 재투자를 망설이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경제 성장률이 5%에도 미치지 못하는 건 내수침체가 직접적인 원인 아닙니까. 2005년 예상 경제 성장률이 4%가 될지 안 될지도 확신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건설경기가 내수시장에 미치는 요인은 굉장히 큽니다. 저소득층을 위한 분배의 정책이라는 점은 납득하지만 경제가 활성화되길 바란다면 건설경기를 살려야 합니다. 현 정부의 정책은 재조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윤해균 대표는 무엇 하나 놓지 않고 다 잡으려하는 정부의 태도가 단 하나도 재대로 잡지 못하는 이유라며 국가의 성장률을 높이고 내수의 활성화를 꾀한다면 분배보다 성장이 위주가 되는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목소릴 높였다.
충청권의 소망이었던 행정수도 이전이 위헌 판정을 받고 사업 자체가 보류되어 버린 상황에 대해 충청도에 기반을 둔 건설인의 입장으로 견해를 밝혔다.
“원만한 조율이 되지 못하고 무산된 것은 못내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수도권은 2,300만이라는 인구가 말해주듯 집중화의 한도를 넘어섰기 때문에 인구분산책으로 행정수도 이전 계획과 비슷한 규모의 계획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수도라는 명칭에 구애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는 머뭇거리지 말고 특화성 도시로 사업을 전환시켜 강하게 추진해 나가야 합니다.”
윤해균 대표는 충청도민들은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정과 정부의 태도에 다소 실망했지만 아직도 그 기대를 버리진 않고 있다고 덧붙인다.
기술개발 동기 끊임없이 유발시켜
초고속 성장 중인 (주)도원디테크의 장점은 기술력과 회사를 이루는 최소 단위인 사람에 있다.
“가진 것도 없고 기댈 곳도 없었지만 직원들 모두 몸으로 현장을 지켜가며 키운 회사이니 방문하시는 분들도 직원들의 가족 같은 분위기를 느낍니다. 건설 엔지니어링의 성패는 결국 사람입니다. 사람만큼 중요한 재산은 없습니다. 각종 사내 문화행사, 포상제도 등을 통해 직원의 사기를 높이는 한편 수시로 회사의 중장기 비전을 제시해 직원들과 목표의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인적자원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윤해균 대표는 “창조하지 못하는 한 발전은 없다”고 말하며 “경영자는 사업을 다각화 시킬 수 있는 아이템을 만들어 내야하며 현 위치에 안주하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윤해균 대표는 자체기술개발 노력뿐만 아니라 디지털 감성경영으로 직원의 역량을 결집하는 경영관리에도 남다른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기업이란 ‘가져가는 것이 아닌 전달하는 것’이란 생각으로 직원들의 복지와 참여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회사윤리강령을 제정 공표하여 전 임직원이 깨끗하고 합리적인 업무수행을 정착시키도록 하는 정도경영을 지향하고 있다.
(주)도원디테크의 또 다른 강점은 정예화․프로화에 있다. 임직원 대부분이 유명 건설사와 연구소, 그룹사 출신으로 80∼90년대 해외건설을 포함한 국내건설 전성기에 상당한 경험과 실적을 쌓은 베테랑들이다. 또한 건축기사 중 색채기사(colorist)가 있어 공장외관에 색채를 응용, 외관의 별장 같은 예술적 표현으로 발주처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다.
특히 이 팀은 작년 KIST하고 같이 수행한 메탄올 합성 PLOT PLANT의 성공적 턴키수행으로 기술력을 인정받은 바 있다.
또한, (주)도원디테크 중소규모업체로서 대형건설사의 턴키프로젝트 조직과 동등한 수준으로 운영이 가능한 사내조직 및 외부협력 시스템으로 구축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소기업체로서 선진화된 건설운영관리와 활발한 사세확장으로 건설관리기술의 중요성 인식 및 기술개발 동기를 유발하고 일반 발주처의 대형건설업체 선호경향에 변화를 가져오는 파급효과로 우리나라 전체 건설 산업의 선진화와 경쟁력 향상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주)도원디테크는 국내산업의 신규투자위축에 따른 열악한 공장건설 환경에서도 설립초년도보다 10배 이상 급신장하며 2004년 상반기에만 240억의 매출을 올려 2004년 연말까지 700억원의 매출을 예상하고 있다.
윤해균 대표는 2005년도 매출은 1,000억원 이상이 무난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주)도원디테크는 현재 충청권을 중심으로 17개 현장의 공사를 수행 중에 있고 수주를 위해 상담중인 공사가 16건에 이르고 있다.
(주)도원디테크는 지속적인 신기술개발과 회사신장을 위해 금년 안으로 대전에 기술연구소와 플랜트 기자재 제조공장을 준비하고 있으며, 연관사업 다각화의 일환으로 자체 성장산업의 구축 및 운영을 계획하고 있다.
윤해균 대표는 "중소건설업체로서 단기간에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건설관리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직원들의 기술개발 동기를 끊임없이 유발시킨 점"이라며 "(주)도원디테크의 초고속 성장은 무조건 대형건설사를 선호하는 일반 발주처들의 인식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한다.
대기업에서도 찾기 힘든 하반기 32명의 신규인원채용과 전직원의 12% 임금인상은 (주)도원디테크의 견실한 기반을 말해준다. 윤해균 대표의 이러한 인력에 대한 투자는 내년에도 이어질 고도성장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주)도원디테크는 2006년 코스탁 진입과 중국 및 동남아로 진출하는 글로벌 일류기업으로의 성장을 목표로 끊임없이 창조하며 전진 중이다. 현재의 삼성엔지니어링 등 대형 엔지니어링사의 뒤를 이어 중형의 플랜트 종합엔지니어링사로 성장해 중국 및 동남아로 진출 하는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나서게 되길 기대한다.
제 3장 글로벌 명품 기업 100년의 약속
■ 도원의 다짐… ‘미래로~ 세계로~’
아무 기댈 곳 없는 맨 땅에서 맨 손으로 출발하여 숨 가쁘게 달려온 10년…
중견 건설기업군으로 성장한 도원은 제 2 창업 신화의 꿈을 열어 또 하나의 10년을 내딛는 출발선 상에서 세계로 향한 도원의 도전 정신은 더욱 새롭게 하여 이어 나갈 것이다.
도원이 세계 속으로 점프하기 위해서는 내부 역량을 들여다보고 글로벌 자세를 더욱 가다듬을 필요를 느껴 회장체제 출범 후 글로벌화의 변신을 시작한다.
해외로부터 객관적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하여 이미 베트남과 우즈베키스탄의 첨단 기업 도시와 미래형 복합도시 건설 프로젝트에 도원이 주간사로 선정되어 있다.
이러한 외부 여건에 발맞추어 도원은 글로벌화 핵심과제와 추진 방향을 수립한다.
국내외 건설 시장은 급속도로 변화하고 세계 선진 건설사는 물론 국내 대형 건설사도 건설 시장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다.
모든 산업이 IT와 금융이 접목하는 복ㆍ융합 수요 개발이 세계 추세로 건설 시장도 마찬가지다로 도원은 이미 화두로 꺼낸 Fusion Engineering 복ㆍ융합건설 시장을 염두에 두고 미리 변화를 읽고 장기 마케팅 전략을 세운다.
Global Standard로 모든 기술업무를 업그레이드 시키고 Documentation 능력을 향상시키고 장ㆍ단기 글로벌화 추진계획 (Globalization Program)의 교육 훈련을 통해 이러한 문제들을 해소시켜 나아가 전체 임직원을 글로벌 마인드로 전환시키는 프로그램도 포함된다.
국제적으로 이해되는 투명 경영, 윤리 경영, 시스템 경영의 수준은 글로벌화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이는 해외 프로젝트 수행과정에서도 기본 이념이 된다.
여기에 관행적으로 답습하는 과거의 패러다임을 초월하여 끊임없는 변화, 개선을 추구하고 모든 일의 대소사를 분문하고 신 성장 동력을 계속 발굴하려는 노력이다.
도원의 지난 10년의 도전은 일감 확보와 회사 규모 신장 위주였다면 향후 10년의 도전은 글로벌 역량 구축이 목표다.
국내 대기업과 대등한 수준의 글로벌 능력에 도전하다보면 일감 확보는 이러한 능력에 부차적으로 따라온다.
도원건설그룹은 건설 시스템 경영을 정착시키고 단위 수준의 전산화에서 탈피하여 업무 프로세스를 혁신하여 통합시스템을 구축하여 건설 시스템 경영관리의 합리화, 효율화하여 생산성 향상과 이익을 극대화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와 같이 글로벌 명품기업을 향한 또 하나의 도전은 시스템이 역동적으로 앞장서서 이끌며 면면히 이어온 도원의 정신과 어우러져 제 2의 신화를 엮어 나갈 것이다.
10년 후 도원은 국내외 프로젝트를 넘나드는 글로벌 건설 기업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사랑 받는 기업으로, 직원에게 활기와 행복을 주는 기업으로 그 모습을 나타날 것이다.
2007년 베트남 하노이 북부 하남성장 및 공무원과 함께
5-2-3 떠나가는 도원 이야기
긴 세월 짧은 뒷이야기
도원 엔지니어링은 본사가 서울 도곡동에 있었으며 크고 작은 플랜트 건설 기술용역 즉 플랜트 설계 업무로 대기업이나 발주처에서 집적 수주하여 수행하며 회사를 개업하자마자 1999년에는 20여명으로 직원 수가 늘어났고 뒤이어 대전에 설립한 도원 디테크 건설은 대전과 충남권으로 부터 수도권까지 진출하여 종합건설회사로서의 면모를 갖추어가며 급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애초에 서울 본사는 도곡동 용호 빌딩 약 10여 평에서 출발하여 3년 만에 3개 층으로 확장하여 쓰다가 2002년 가을 어느 날 뱅뱅 사거리 큰길 옆 동문빌딩 (6층 건물인데 6층만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전 층을 다 본사사옥으로 썼다 ) 으로 역사적인 본사이전을 하게 되는데 경사스러운 것이 공교롭게도 이전 하는날 충주 GCI 건설공사입찰에 낙찰되어 72억 계약하는 날이었다.
본사 이전과 함께 기념식도 갖고 도원 그룹이 크게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잡은 것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경기 열기와 건설 경기 호조로 인한 경기 부양에 발맞추어 그간 쌓아온 도원의 건설 설계 주력 업무인 EPC 사업이 빛을 발하는 시발점이 되었고 우리는 더 강해진 내공과 실력, 열정으로 거칠 것 없이 5년여를 수직으로 성장하여 회사는 커지고 계열사 5개와 200여명의 임직원을 거느린 중견 기업이 되었다.
2006년에는 년 매출 1000억을 넘기며 그룹형태의 회사로 발전하여 그 누가 보아도 성공한 기업으로 대내외적으로 소문이 났다.
그간 해외로 유학 갔던 딸아이와 아내가 귀국하여 IMF로 헤어졌던 가정을 다시 꾸리고 분당 오포에서 완전한 가정생활을 오랬만에 갖게 되었고 회사일도 자리 잡고 가족도 만나 사업이 본궤도에 올라 한숨 쉴 때 시간이 있어 그동안 미뤄왔던 평생소원인 대학공부를 시작하여 일사천리로 한성 디지털 대학교에 입학하여 한성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학위 까지 마치게 되었다.
2008년 7월 만학으로 한성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 학위 수료식에서
학업을 도와 내조해준 아내와함께-
그 당시 대외 활동으로는 한국 기술 혁신협회 ( INNOBIZ협회 ) 수석 부회장과 한중 중소기업협회 회장을 맡아 활발하게 사회 활동도하고 국내 중소 기업대표로 단장을 맡아 2007년에 많은 기업인 대표로 평양도방문하고 세계 각국 중국을 포함 베트남, 카자흐스탄, 일본, 우즈베키스탄등 많은 나라를 방문하여 국위 선양과 국내 중소기업의 해외 진출에 일조를 하였고 도원건설도 중국 청도 지사 설립에 이어 베트남 하노이에 지사도 세우고 하노이 북부에 하남 한국 산업단지 조성사업에 대규모로 투자하여 회사 중심이 국내에서 해외로 비중을 높여갔다.
2007년 이 당시 활발한 해외 진출과 더불어 큰 그림과 2008년 창립 10주년을 맡아 2010비젼 선포를 하며 큰 회사로 향한 계획을 착착 진행하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짧지 않은 시간 기업이 10년을 유지하기 힘든 시절임에도 몇 안되는 성공한 기업인으로 건설 교통부에서 상도 받고 국세청장 감사패, 기술혁신 대상 등 내가 근무하는 회장실 한쪽 벽면에는 상장과 감사패, 기념패들로 꽉 차있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멈추면 망한다는 기업의 순리로 자연스럽게 해외사업과 신규사업, 분양사업, 개발 사업 등 사업 초기에는 생각지도 못하고 손대기 꺼려하던 사업을 손쉽게 사업 확장하며 도전적 경영을 하게 되었다.
2008년 7월 도원 그룹 창립 10주년기념식 얼마 전 서초동 국제 전자센터에서 2020 비젼 선포식을 성대하게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부터 발생한 리먼 사태가 한국 경제를 덮치기 시작하더니 각 은행마다 대출금 회수와 보증 철회 등으로 도원 그룹은 심한 자금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회사에 비운의 검은 그림자가 비치고 채권자들이 수시로 들락거리고 자금을 구하느라 전전긍긍하며 이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너무도 늦은 시간으로 회생하느라 더 큰 실수를 하는 사건이 연일 발생하였다.
내 기억으로 2008년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던 기나긴 여름 온몸이 땀이 나고 혼 줄이 나간 나는 몸도 마음도 무거워 총기도 무뎌지고 한없는 절망감에 휩싸여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는 시기였다.
이미 파멸의 길로 들어가는 회사를 보며 주위는 모두 나에 대해 반대편에 서서 손가락질하고 내편은 하나도 없는 험한 사태 속에 또다시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된다.
재촉하는 협력업체의 채무, 밀린 직원들 봉급, 여기 저기 아우성과 데모, 무너지는 현장 뿔뿔이 흩어지는 직원 그간 믿고 지냈던 주변 모두가 사라지고 도움을 청할 곳이 하나도 없이 고립되어 후회하며 홀로 견디어내던 중 주변에 엉터리 같은 친구의 꼬임과 급하게 알게 된 변호사와 상의 하던 중 국내에서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 하여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나에게 더 버틸 힘도 없이 절망적인 시점이라 나의 주관과는 다르게 솔깃하여 해외로 도피하는 결정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하는 내 인생에서 중대한 실책이자 나쁜 결정이었다.
어렵게 창업할 때의 기백과 자신감 열정으로 정면 돌파를 하여 모든 일을 죽기로 각오하고 이 난국을 헤쳐 나갔어야하는데 나답지 않게 야반도주하여 회사정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여지도 말살한 채 주변에 실망과 회사에 오명을 잔뜩 지운 실패한 CEO의 길로 가고 말았다.
기업이 처음 설립할 때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되는 표준 매뉴얼이 있다면 기업이 부도나 파산으로 폐업할 때도 규칙이나 절차 매뉴얼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지금은 후배 기업인들에게 나의 실패를 거울삼아 엄연히 존재하는 실패의 자산을 조언 해주곤 합니다.
이제야 나는 기억하고 정확하게 그때의 실패 원인을 이야기 할 수가 있다
과욕이나, 무지한 악성 경영, 미래예측을 못한 무지함, 주변이의 역할, 주변 환경 등 모든 것을 대비하지 못한 해이한 정신 잃어버린 초심 모두가 내 탓이다.
그리고 더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절제 되지못한 생활, 경영철학이 없고 불필요한 행동과 술자리의 남발 그래서 모든 탓을 한글자로 굳이 줄인다면 술 이였다.
취중경영과 몽롱한 상태에서 얻어맞은 강펀치로 나는 그렇게 떨어져 나갔고 큰 기업을 이끈 대표는 신세타령이나 하는 무식한 야인이 되어서는 안 되며 경영을 핑계로 술과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 경영자가 술을 멀리하지 않으면 술 은 몸보다 먼저 회사를 망하게 만든다
이쯤에서 그나마 10여 년간 회사를 경영하며 잘못한 것도 많지만 잘한 것과 잊지 못할 일화가 몇 가지 있어 이야기합니다.
첫째로 IMF 실직 위기에서 좌절하지 않고 위기를 기회로 삼아 맨손으로 성공을 이룬 것은 뜨거운 열정이었다. 주어진 악조건에서 차갑게 명석해진 머리와 밝은 미래를 꿈꾸며 과감히 헤쳐 나가 100점은 아니더라도 나는 성공을 하였고 평탄치는 않았어도 도덕적으로도 깨끗했고 명에도 잃지 않고 마무리하여 젊었을 때의 이번 도전은 분명 가치가 있고 지금도 자랑스러워하고 운도 많이 따랐다고 본다.
실직 후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도 많이 하였지만 나 스스로 내가 가진 국내외 건설 기술 경험을 바탕으로 설계기술, 플랜트 건설EPC를 중소 기업화하여 고객의 신뢰를 얻는 방법 ,새로운 건설 페러다임 으로 현장을 중시하고 동아에서 배운 영업기술을 발휘하여 품질과 안전을 우선하여 고객이 다시 찾는 명품 건설회사로 성장하였고 자부심도 또한 컸었다.
한참 잘될 때 베트남 사업에 투자하려할 때 지인 한분이 나에게 조언을 하는데 회사 크게 하지마시고 나처럼 조그맣게 하시며 재미있게 노시면서사세요 하고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고 나중에 회사 폐업에 결정적인 실수로 투자를 감행한 것이다.
그리고 2006년 중소기업청에서 국내 INNOBIZ 협회 회장직을 권유했을 때 회사일의 집중도가 떨어 질까봐 사양하였고 국내 재벌기업에서 도원건설을 좋은 조건에 인수합병하려는 것도 회사를 아끼고 사랑하는 애틋한 정으로 좋은 기회 다 버리고 요청할 때도 또 무엇의 자신감과 쓸데없는 자존감이 생겨서 좋은 복을 물리친 것 땅을 치고 후회할 일중의 하나이다.
회사 일에 몰두하여 2010비젼도 선포하고 100년 컴퍼니를 공포 브랜드도 SIUS로 하여 브랜드 선포식과 기념식을 동강에서 레프팅과 함께 성대히 치루었고 각종 그룹행사와 ,국내외 사업 확장 , 해외 지사 설립, 특히 2007년에는 북한 평양에 방문 남포공단에 공장 투자 및 유치 ,신규 사업 등 모든일에 과감하고 도전적으로 활발히 경영하였다.
1998년 7월 회사를 창업하여 CEO 단상을 쓰고 10년 후 CEO 반성문으로 마친 내 젊은 날의 뜨거웠던 한편의 연극 같은 도원이야기 나는 회상 한다
도전하여 얻은 것은 많지만 잃은 것은 하나도 없다
처음부터 가진 것 없이 뜨거운 열정과 불우했던 지난날을 거름삼아 만든 소중한 자산으로 남의 도움이나 돈을 빌리지 않고 시작하여 정상까지 힘차게 올라가본 숱한 경험
힘들었지만 행복했고 많은 사람이 즐거워하고 더불어 잘 살게 되었고 지금도 자신 있게 이야기 한다.
다시 그 옛날이 오더라도 나는 똑같이 결심하고 행동했을 거라고 일부 작은 뉘우침이나 잘못 혼란스러웠던 착각과 실수는 있었어도 큰 후회는 없다는 뜻이다.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과거로부터 자유로우면서 옛 영화를 추억하며 편한 마음으로 지금을 맞이하며 그 누구보다 떳떳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고 나의 소중한 경험과 아직 남아있는 나의 뜨거운 열정 모든 것이 멈추어져있지 않고 진행 중이고 더구나 건강한 몸과 총명한 머리를 통제하는 가슴은 아직도 잘 뛰고 있다.
인생은 짧으니 지금까지의 이같은 도전이 없었다면 더 후회하는 오늘이 되었을 것이다.
나를 빛내주고 영화 같은 삶과 사연을 준 도원그룹이여 덕분에 울고 웃으며 행복했고
늘 감사한마음을 갖고 이글을 쓰며 오늘도 가슴 짠하게 그리워합니다.
가끔은 레스토랑 스카치 앞에서도 시작을 한다
5-3 감성 건설 경영에 시를 입히다
중학교 때부터 거의 매일 일기를 써왔고 누구나 그랬듯이 일기에는 지나간 일에 대한 반성, 후회와 행복했던 일 그리고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적기도하고 생활상의 불평불만을 늘어놓기도 하며 나쁜 일들은 글을 쓰며 잊으려 애쓰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꾸준히 써오고 있으며 내게 있어서는 크고 작은 격동의 세월 속에 버팀목이 되어주고 그 무엇보다도 큰 위안이 되었고 바르게 성장하고 바르게 살게끔 일기를 통해 반추하고 지침을 적어서 지켜나간 것이다.
나는 책 서두에서도 이야기 하였지만 글을 쓰면서 인생을 두 번 맛보는 즐거움이 있다.
고난과 희열을 느끼는 그 순간에 한번,
추억 속에 빠져서 그때의 상황을 적어나가면서 또 한번의 행복을 느낀다.
친할아버지께서 한학자이시면서 한시를 많이 남기셨고 사촌들 중에서도 상균 형님이나 영희, 정희 여동생같이 글 잘 쓰는 유전인자가 있는 까닭이라고 믿다보니 윤씨 친사촌들의 모임인 윤사랑 밴드에 가끔 실리는 문구 또한 탁월한 문학적인 면도 많이 보인다.
그리고 아들 호영이도 어릴 때부터 일기 속에 쓰인 시를 봤는데 제법 시를 잘 쓰느것 같고
맏손주인 채은이도 9살 나이치고는 글짓기가 제법이라 나는 집안 내력으로 굳게 믿고 있다.
내가 모임에서 하는 이야기 중 백 프로 맞는 말은 아니나 유명한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시를 잘 쓰는 유전인자를 갖고 태어나서 김소월 시인님과 윤동주 시인님과 같이 어릴 때부터 학문을 쌓기 전에 훌륭한 시를 쓰기 시작한 것 만 봐도 그렇다.
사회에서 공부 잘해서 국가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 호칭 뒤에는 사 ( 사 )자가 붙는다, 의사, 변호사, 판사, 검사, 조리사, 약사, 회계사 등 그리고 한 가지 분야에 도전하여 큰 업적을 이룬 달인에게는 가 ( 가 )자를 붙인다 조각가, 작가, 화가, 공예가, 연출가 등 그러나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유일하게 인 ( 인 )자를 붙인다 즉 태어나는 것이고 하늘이 내려준 재능으로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유일하게 인자를 붙여 시인이라고 불리 우는 것입니다.
문과에 들어가서 배움으로 작가의 글을 쓸 수 있으나 시를 짓기에는 나처럼 부족하다는 순전히 나의 생각 나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결국에는 어려운 환경을 이기려고 틈틈이 써온 일기 덕분에 시도 접하게 되어 흉내 내다가 2008년 우연히 우보환 시인을 만나 시담과 술잔을 주고받다가 의형제를 맺고 추천을 받아 곧바로 세계문학 시 부문에 응모하여 신인상을 수상한 후 자연스럽고 운명적으로 시인으로 등단하여 시를 쓰며 시마을 모임도 열심히 나가고 이때 작가모임에서 만난 이의웅 시인님을 멘토 은사님으로 모시고 나름대로 시을 쓰며 많은 것을 사사받은 덕분에 지금껏 멈추지 않고 즐거이 시작을 하고 있다.
나는 자칭 생활시인 혹은 건설시인이라 불리우 길 좋아하고 그야말로 홀로 만족해하며 자유로운 영혼으로 시인들과 어울려 놀다가 동인 시집도 내고 블러그를 만들어 올리기도 하고 나만의 시를 쓰고 내가 작성한 글 내가 제일 많이 읽고, 늘 경이롭게 보고, 많이 감탄해하며 내가 쓴 글 현재까지 약200여 편을 내가 낳은 자식처럼 사랑하고 아낀다.
그리고 내가 칠순 됐을 때 처음으로 개인 시집을 내어 출판 기념회 겸할까 하는 작은 욕심도 생각중이다.
이 책 자서전을 쓰면서도 그간의 시와 수필 습작이 많이 도움이 되었으며 중간 중간에 삽입된 시편도 나를 알리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사진과 함께 건설인의 생활상까지 펼쳐서 일반적이고 흔한 자서전보다는 문학과 전공을 시와 수필로 재밌게 전개 시키려 노력하였습니다.
살아오면서 많은 고초와 역경을 딛고 보아온 세상의 모든 이치와 섭리와 행복과 번민 속에서도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순간순간 마다 감정을 놓치지 않고 시로 표현하고 내가 쓰고 내가 읽고, 내가 우선적으로 위로가 되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가를 부르며 기분 좋아하는 그날부터 지금까지 늘 행복한 시인 이였습니다.
추가로 작은 기대가 되고 바라는 것은 내시를 읽고 공감하거나 같이 후회하고 미래를 밝게 꿈꿀 수 있는 나 이외에 한명만이라도 있다면 큰 보람일 것입니다
앞으로도 지혜롭고 건강한 노년생활을 바라고 더 나아가 행복하기보다는 가치 있는 삶을 위해 계속해서 시와 씨름하며 평생을 같이 하겠습니다.
내가 시인으로 거듭나는데 도와주신 은사님 왼쪽부터 월간 문학세계 김천우 편집인 대표님, 필자,
원로 김송배 시인님, 은사를 자처하시고 아낌없이 나에게 사사를 주신 이의웅 시인님
2008년 4월 내가 회원으로 있는 시마을 시인 봄모임에서 시인 등단식을 기념하며
아래는 시를 쓰는데 매뉴알이나 시를 가르치는 교육은 없어도 가이드라인 정도의 지침을 잘 정리해놓은 글이 있어 올립니다, 참고로만 보시고 꼭 따라하지 않아도 되고 초보자분이나 시를 좋아하는 분이 시를 쓰기위한 안내서 정도입니다.
시를 쓰기위한 Tip
시라는 것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도 없고 틀도 없이 상상하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쓰는 것으로 꼭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니 아래 글은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1. 시는 기승전결이 있어야하며 막연하게 쓰지 말아야합니다
전체시의 흐름은 아무리 짧은 시라도 시작이 있으면 결론도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막연하게 쓰려면 어려워집니다. 당신의 주장이 나타나는 뚜렷한 주제를 정하고 소재를 정한다음, 그냥 좋았다, 재미있었다. 슬펐다가 아니라 어떻게 좋고 재미있고, 슬픈지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부분은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가리는 것이 더 낫다고 보이는 부분은 숨기기를 하여 살짝 비유를 하여 넘어 갑니다 . 관념이 구체화되고 형상화되었을 때 시가 될 수 있으므로, 묘사하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2. 제목과 내용이 잘 맞아야 합니다
제목과 내용이 따로 놀면 감동이 없어집니다. 항상 제목과 맞는 말을 쓰고 있는지 확인하면서 써야합니다 . 온갖 것을 나열하지 말고 포인트를 잡아서 줄기차게 제목하고 맞는 것만을 선택해야합니다 . 도자기도, 그림도, 사진도, 시도 모두 엑센트가 있습니다.
3. 남들이 경험도 못하고, 차마 생각조차 못한 것을 찾아서 써야 좋은 글입니다.
남들이 다 알고 있고, 다 생각하는 것을 쓰면 잔소리일 뿐, 아무도 감동하지 않습니다.
단단한 사상과 많은 경험을 토대로 시가 되므로 우리는 그런 부분에 좀 더 눈을 뜨고 노력 할 필요가 있습니다 .
4.문장은 간결하게 끊어주고, 살아 움직이는 문장으로 바꾸어 주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죽은 나무를 살리고, 바위를 살리고, 들판과 하늘과 바다를 모두 살려보면 좋은 문장이 됩니다 .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라는 화가는
1814년 10월 4일 ~ 1875년 1월 20일까지 살았던 프랑스 출생의 세계적인 화가입니다.
이 사람은 만종을 그릴 때 황금 높이를 설정하여 농부 부부의 키가 하늘에 더 올라가거나 더 내려오게 하지 않고 적당한 높이를 설정하여 그림의 답답함을 없도록 하고 경건, 우수, 숭고함, 진실감을 더욱 돋보이게 했습니다 .
시의 문장도 이와 마찬가지로 너무 욕심을 부려 내용을 압축하여 나타내야합니다
5. 나열이나 사실기록 보다는 묘사를 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나열하는 일기나 옛이야기와 같은 설명문 보다는 치밀하게 느낌을 묘사 해야합니다. 한 편의 시는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 긴 드라마가 한 편에 녹아있어야합니다. 하나의 주제와 소재를 정하면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을 집요하게 펼칠 수 있어야합니다 .
6. 시는 정확한 어휘력으로 과장 없이 진솔하고 젊게 써야합니다
문체나 글만 보면 저자의 나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젊은 문체로 신선하게 써야합니다.
정확한 어휘력을 키우고 과장이 없이 진솔하게 써 내려 간 글에서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어대사전을 수시로 읽어보고 적어보거나 시를 쓰는데 필요한 단어장을 만들어서
따로 관리합니다.
7. 구어체나 욕설, 혐오스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야하며, 표준어를 사용합니다.
옛날 말투를 그대로 인용하는 문장이나 감탄사를 난발하거나 한문으로 된 말을 한글로 표현 하도록 하며, 한두 군데 나타나는 사투리는 삼가고 전체 문장을 방언시로 정하여 쓰는 것은 좋습니다.
8. 보여주기와 감추기를 적절히 반반 비율을 염두에 두고 써 내려갑니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반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나머지 반은 비유를 끌어와서 숨기기를 하면 좋은 시가 되는데 수월해집니다.
9. 한 편의 시 안에서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거나 뜻이 중복되는 단어가 있으면 안됩니다
자신의 감정에 도취되어 할 말에 욕심을 부리면 무두 나열하게 되는 수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사설이 길어져서 문장이 늘어지며, 주제가 한 눈에 쏘옥 들어오지 않게 되기 일쑤입니다. 시는 짧은 문장 안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시의 특징입니다 . 이 특징에 맞게 쓸 때 좋은 글이라고 합니다
같은 뜻이 감긴 단어를 나열하여 중복시키는 것도 예술성을 떨어지게 합니다 .
10. 너무 친절하지 말며, ‘낯설게 하기로 독자의 몫도 남겨 놓습니다.
독자가 생각 할 것을 남겨놓지 않고 마지막까지 모두 말해주는 유치원선생님처럼 지나치게 친절하면 좋은 시가 될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독자가 시를 읽고 생각 해 보며 맛을 음미하는 여백의 시간을 남겨주는 시가 좋은시로 평가되는데 이것을 '낯설게 하기'와 '침묵의 기법'이라고 합니다.
시인이 아닌 사람들이 쓰는 상투 언어에서 벗어나 '낯설게 하기' 기법을 익혀 쉽게 감동을 불러 오도록 합시다 .
상투의 틀에 붙잡히지 말고 끊임없이 새로운 긴장감으로 분위기만 그리다 마는 감상적인 시의 틀을 깨고 '시적인 것'을 구사하도록 해야합니다 . 감상적인 표현과 싯적 표현을 확연히 구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11. ‘침묵의 기술, 생략의 기술'을 익힙니다
시와 유행가의 차이는 그것이 침묵인가 아닌가의 차이입니다. 시는 감상이 아니라 우리를 긴장시키는 힘이 있는 것인데, 만약 설명하려다보면 감상의 넋두리로 떨어져 버리게
된답니다. 침묵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그 시는 성공 할 것이다'라고 말라르메는 말했습니다 .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
이 짧은 두 행의 사이에는 시인 자신이 말로 설명하지 않은 수 많은 말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음이 보입니다.
침묵의 기술을 익히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한 법. 우리는 많이 쓰고 또 그 만큼 많이 지워야 합니다. 시를 쓸 때도 다른 모든 세상일처럼 피나는 연습이 필요하며 더욱이 말로 다 설명하지 않으면서 형상화하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음식을 만들 때도 음식 재료를 너무 여러 가지 좋다는 것은 다 넣으면 잡탕이 되어 버립니다 . 제일 메뉴가 많은 음식점인 ‘김밥천국 24시’ 그런데는 가격이 제일 싸답니다 .
확실하게 한 가지만 파는 한정식집, 해물전문점,고기전문점은 가격이 비싸지요 ?
12. 시는 감동이 있어야합니다.
싯적 감동은 정신적으로 전율을 느껴야만 나올 수 있습니다. 시는 기록문이 아니라 예술이므로 반드시 감동을 줄 수 있어야합니다 . 자신의 글을 읽고 과연 타인이라면 감동이 올 것인지 마지막으로 꼭 검토를 해야합니다. 자신이 감동하지 않은 글을 남들이 감동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 자신이 감동이 오지 않는다면 그 글은 발표를 하면 예술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
13. 독자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합니다 .
미술을 모르는 사람한테도 밀레의 ‘ 만종’ 이나 ‘이삭줍기’, '씨 뿌리는 사람' 등 농부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들이 의뢰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것은 바로 그 당시의 시대적, 환경적인 대중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주의(Realism) 혹은 자연주의(Naturalism) 화가라 불리고 있는 그는 데생과 동판화에도 뛰어나 많은 걸작을 남겼지요. 시인으로 살면서 흉내만 내다 가는 사람이 있고, 이와 같이 밀레처럼 유명한 예술작품을 남기고 가는 사람이 있는데 그 차이는 바로 이런 13가지의 요소를 충실히 지켰을 때 오는 영광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 옮긴글에서 )
시
윤 해 균
문자로 표현되고
노래처럼 부르게 하되
설명하지 않고
표현도 몸짓도
더구나
변명이나 반성도 하지 말고
사진도 그림도 말고
모양으로 그려서도 안 된다
시는 문장 그자체가 빛나고
새로운 창의로 넘치고
뜻 넘어 여백의 나머지는
읽는 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2016년 송년회에서 시마을회 고문이자 절친인 이덕주 시인과 함께
2008년 등단시 한국 문단의 원로이신 김송배 시인님 / 고문님과 함께
취한 시
윤 해 균
떨어진 기온을 탓하며
끌려 들어가는 나그네
흐르는 재즈를 벗 삼아
훅 피워있는 연기 속에
사연위해 두리번거리다
앉아다가 서다가 취하고
어서 야심한 밤이 되면
감싼 어둠에도 취 한다
도곡동 도원본사 회장실에서
5-4 회장의 하루 일과
10년 넘게 도원 건설 그룹을 이끄는 동안 창업당시의 도원결의와 신념도 있었지만 나만의 경영 방침을 세워 큰 회사를 운영하며 정상으로 끄어올린 원동력이 되었다.
그 첫째가 고객과의 신뢰 그래서 회사 최초 슬로건도 “고객이 다시 찾는 도원 건설 ”이었고 영업업무와 수주활동, 현장수행 관리 방안 등 모든 면에서 고객 편에 서서 품질, 안전을 중시한 덕에 큰 사고 없이 안전하고 잘 성장이 되는 우량회사로 된 계기가 되었다.
나는 현장소장 할 때와 마찬가지로 회사 도곡동 근처 서초동으로 집을 옮기고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늦어도 7시전에는 회사 사무실에 도착하여 맨 먼저 현장 상황을 첵크하고 안전보고를 받는 것을 시작으로 하루 계획을 잡고 각종 회의나 행사를 주관하는 계획을 잡고 각 회사 사장단 회의를 8시 정각에 시작하여 직원들 출근 전인 8시 30분에 마무리하고 오전 근무에 들어간다.
점심은 가급적 회사 임직원을 배제하고 외부인사와 정보공유 차원에서 자주 만나고 오후에는 발주처 회의가 없을 시는 건설 현장 방문이나 경제인 모임, 정부기관회의, 기술혁신협회 회의 ( 당시 한국 기술혁신협회 ,INNOBIZ 수석 부회장 이였음 ) 개발사업 회의 등 빈틈없는 일정에 따라 단 하루 한시도 여유가 없는 열정과 보람찬 시간의 연속이었다.
퇴근 후 야근을 할 때도 있었으나 대부분 외부인사와 회식으로 거의 대부분 술자리가 이어져 늦게까지 있다가 자정이 다되어서야 대리운전기사가모는 에쿠스 회장 차 뒷자리에 누워 집에 가곤하였다. 숨 가쁘게 흘러가는 일주일의 벅찬 일정, 매일 밤늦도록 가지는 회식자리, 장거리 국내, 해외출장, 많은 회의와 고독한 결정 사항들, 지금 내가 생각해도 그렇게까지 일하고도 건강히 잘 버틸 수 있었나 신기하기도하고 지금 다시 하라고 그러면 절대 하지 못할 강행군을 거의 십년간 아슬아슬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 과중한 업무 극심한 몸에 대한 혹사, 정신적인 고뇌와 스트레스,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갖은고생과 노력한대로 성장하는 회사의 성과가 눈에 보이고 회사가 점점 커가고 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고 자연히 신도 났다.
건설 수주가 한 건당 100억 이상이 매번 계약되고 현장이 20여개로 늘어나고 현금보유도 점점 쌓여 매출이 매년 2배로 증가하여 2007년에는 년 매출 1000억을 돌파하여 그야말로 승승 장구 하였다.
그 당시 거칠 것도, 두려워할 것도, 방해할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성장을 위한 것이라면 신규사업, 해외투자, 북한사업 참여 등 많은 사업을 하면서도 꿋꿋하게 성장하여 잘나가는 회사로 명실 공히 국내 중견 EPC 건설회사로서의 그룹 회사였고 나 역시 신념을 갖고 더 잘할 수 있다는 믿음과 자신감으로 건강한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며 나아갈 때로 그 무엇도 절대 멈출 수 없는 욕망의 열차가 되어 달릴 뿐 이였다.
도원 그룹 임원회의- 필자 옆으로 도원건설 정구철사장, 도원엔지니어링 김인준사장, 인지건축사 한만원사장
2006년 우수사원 회장 표창수여식 당시 건설본부장이였던 최용덕이사
2005년 도원건설 우수 협력업체 사장님들과 포상식후 기념사진
도원건설 우수사원 2005년 포상식
2006년 도원건설 본사 회의실에서 베트남 하남성장 반-끄엉 서기장과 하남 산업단지 업무 협의중
사업 다각화 시키는 창조력이 발전의 힘
(주)도원 디테크 대표 윤해균에 대한 기사 원고자료
2005년 들어서 건설시장의 침체가 심각한 수준이다. 신행정수도 이전 위헌 판결로 인해 충청권 건설경기가 급속히 얼어붙기 시작해 종합부동산세의 시행을 앞두고 완전히 얼어버리려는 조짐마저 보인다.
이러한 침체된 건설시장 속에서 엘리베이터 상승과 같은 초고속 성장을 보이는 (주)도원디테크 윤해균 대표에게 초고속 성장을 이룰 수 있던 원동력과 건설시장의 문제점, 2005년 건설시장의 전망을 들어본다.
서울시 강남구 도곡동에 위치한 (주)도원엔지니어링은 중소규모 공장을 설계·시공해 주는 업체이다. (주)도원엔지니어링의 뿌리는 동아건설 계열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너지, 석유화학, 발전소 및 산업설비 등 플랜트와 토목, 건축, 환경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종합 엔지니어링과 종합 건설을 25년간 수행하여온 국내 유수의 동아건설이 흔들리자 1998년 윤해균 대표는 동아출신을 중심으로 유능한 기술자들을 모아 (주)도원엔지니어링을 설립하였고 그 이후 사세확장과 건설기술을 특화하여 도원엔지니어링의 일부기능을 분사 2002년 12월 종합건설업체인 (주)디테크건설을 설립하였다. (주)디테크건설은 모회사격인 도원엔지니어링의 대전·충청권 사업을 위해 분사형태로 설립됐다.
그 후 (주)디테크건설은 2004년 1월 1일부로 자본금 12억 원으로의 증자와 함께 (주)도원디테크로 사명을 변경했다. (주)디테크 건설과 (주)도원엔지니어링, 이 두 회사의 합병을 계기로 (주)도원 디테크는 '제2의 창업'을 맞이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타의에 의해 '퇴출'이라는 쓰라린 아픔을 갖고 모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사원들의 회사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 (주)도원 디테크는 112명에 달하는 임직원들의 애사심과 팀워크를 바탕으로 하여 '패스트 트랙(FAST-TRACK)'이라는 선진화된 공법을 도입하고 있다. 패스트 트랙이란 원래 고속도로의 추월선을 의미하지만 설계·건설 분야에서는 사업주를 대신해 부지선정, 기획, 허가, 설계, 시공을 동시에 수행하는 일괄수주사업 방식(EPC)을 일컫는다. 이는 턴키방식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첨단 공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벤처공장을 턴키방식으로 설립해 주는 일괄수주공사 사업을 시작한지 2년 만에 (주)도원은 이 분야의 선두업체로 올라섰다.
윤해균 대표는 "패스트 트랙 공법은 품질향상과 공기단축은 물론 공사비도 15∼20%까지 절감할 수 있어 선진국과 국내 대기업에서 이미 도입해 사용하고 있는 공법"이라고 설명한다.
(주)도원 디테크는 그간 국내와 해외에서 수많은 실적을 쌓아왔다. 일본 도요엔지니어링이 말레이시아에 세운 연 90만톤 생산규모의 에틸렌 플랜트 건설에 참여했으며 미쓰비시가 파키스탄에 세운 PVC 플랜트를 수주받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농심의 평택 식용유저장터미널, 대림산업의 부산 가스LNG플랜트, 삼성 엔지니어링의 폐수처리설비 등 12개의 플랜트를 완공했다.
그리고 일본 산코 엔지니어링과 기술업무를 제휴했으며 미국 카이저엔지니어스와도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지난해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공동으로 메탄올합성 시범공장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기술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또한 3년 전부터 플랜트기술의 우수성을 활용 보완하여 최근 활황세로 일고 있는 반도체 IT, BT관련 설비의 공장 및 건물관련 설계 및 시공에 접목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둬 업계에 주목을 받고 있다.
동아 인들이 만든 성공
98년 5월말 IMF 외환위기로 정부의 대대적인 구조조정 작업이 있었다. 그 일환으로 국내 굴지의 엔지니어링 업체였던 동아엔지니어링의 퇴출작업이 있었다.
따라서 380여명에 달했던 동아엔지니어링의 직원들이 졸지에 실직자로 전락했다. 더구나 노조위원장의 자살은 각종 언론에 떠들썩하게 보도된 바 있다.
사업개발부장으로 퇴직한 윤해균 대표는 “동료들의 어려움을 구경만 할 수 없었다.” “창업 후 4개월간은 직원들 월급도 주지 못했고, 돈을 버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엔지니어링 사업을 잠정 중단하고 직원들과 길거리에서 옷 장사를 하기도 했다”고 당시의 고난에 대해 언급한다.
또한 직원들에 대해 “일반 및 건설기계를 비롯하여, 화학 장치 설비, 소방설비, 전기설비, 공기냉동설비, 산업안전, 품질관리 등 전 분야에 걸쳐 기사 1, 2급 및 기술사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을 정도의 고급엔지니어들”이라며 “그때의 고생으로 인해 모두가 밤낮없이 하나로 뭉쳐 일할 수 있었으며 그 덕에 IMF위기가 오히려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 고마운 기회가 되었다”고 윤해균 대표는 환하게 웃는다.
(주)도원 디테크는 최근 와이드 청주오창공장, (주)홍삼 바이오텍 홍성 공장 및 사옥 이외 다수의 턴키 공사를 수주하고 있으며 지난 10월 켈리포니아 얼반시에 미국 법인인 DOWON CORPORATION/ USA 설립하여 미국 신기술 협약은 물론 첨단 플랜트 기자재 AGENCY 업무와 합작선 구축 및 다양한 사업을 펼칠 예정이다. 또한 (주)도원 디테크는 지속적인 신기술개발과 회사신장을 위해 대전에 기술연구소와 플랜트기자재 제조공장을 준비하고 있으며, 연관 사업다각화의 일환으로 자체 성장산업의 구축 및 운영을 계획하고 있다.
한편 (주)도원 디테크는 2005년부터 원수명 전무를 부사장으로 진급시켜 도원엔지니어링의 공동책임자로 선임했다. 이는 회사를 책임경영체재로 전환하여 국내 선두를 달리는 엔지니어링사로 거듭나기 위한 포석이다.
다각도의 다양한 사업을 추진 중인 (주)도원 디테크는 특화된 기술로 우량기술기업 선정(기술신용보증기금), 창조기업인상(중소기업청), INNO-BIZ기업선정(중소기업청)되는 등 건강하고 강한 건설회사로 자리매김 하였다.
분배 위주의 정책 내수경제 못살려
건설경기가 내수 시장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현재 내수경기는 갈수록 악화되어 가고 있다.
“2005년도 건설경기가 침체일 것이라는 점이 더 문제입니다. 건설부분은 일정한 성장률을 보이게 마련인데 근래에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정부가 관 공사를 일시적으로 많이 푼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윤해균 대표는 그때그때 위기를 벗어나려는 정부의 한시적인 해결 방안에 대해 실망하고 있었다.
“일시적 투자로 재투자를 이끌긴 힘듭니다. 장기적인 해결방안이 필요합니다. 자본이 있는 투자자가 투자할 수 있는 환경요건을 만드는 것이 제일 시급합니다.”
현 정부의 정책방향에 대한 발언도 윤해균 대표는 빠뜨리지 않았다.
“현 정부의 정책을 보면 성장위주의 정책을 포기한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현 정부는 성장과 분배란 두 마리의 토끼를 한 번에 쫓고 있기 때문에 한 마리의 토끼도 잡기 힘든 겁니다. 종합부동산세 같은 법적 제도는 투자자의 재투자를 망설이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경제 성장률이 5%에도 미치지 못하는 건 내수침체가 직접적인 원인 아닙니까. 2005년 예상 경제 성장률이 4%가 될지 안 될지도 확신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건설경기가 내수시장에 미치는 요인은 굉장히 큽니다. 저소득층을 위한 분배의 정책이라는 점은 납득하지만 경제가 활성화되길 바란다면 건설경기를 살려야 합니다. 현 정부의 정책은 재 조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윤해균 대표는 무엇 하나 놓지 않고 다 잡으려하는 정부의 태도가 단 하나도 재대로 잡지 못하는 이유라며 국가의 성장률을 높이고 내수의 활성화를 꾀한다면 분배보다 성장이 위주가 되는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목소릴 높였다.
충청권의 소망이었던 행정수도 이전이 위헌 판정을 받고 사업 자체가 보류되어 버린 상황에 대해 충청도에 기반을 둔 건설인의 입장으로 견해를 밝혔다.
“원만한 조율이 되지 못하고 무산된 것은 못내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수도권은 2,300만이라는 인구가 말해주듯 집중화의 한도를 넘어섰기 때문에 인구분산 책으로 행정수도 이전 계획과 비슷한 규모의 계획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수도라는 명칭에 구애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는 머뭇거리지 말고 특화도시로 사업을 전환시켜 강하게 추진해 나가야 합니다.”
윤해균 대표는 충청도민들은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정과 정부의 태도에 다소 실망했지만 아직도 그 기대를 버리진 않고 있다고 덧붙인다.
기술개발 동기 끊임없이 유발시켜
초고속 성장 중인 (주)도원 디테크의 장점은 기술력과 회사를 이루는 최소 단위인 정예화 된 사람 즉 기술 인력에 있다.
“가진 것도 없고 기댈 곳도 없었지만 직원들 모두 몸으로 현장을 지켜가며 키운 회사이니 방문하시는 분들도 직원들의 가족 같은 분위기를 느낍니다. 건설 엔지니어링의 성패는 결국 사람입니다. 사람만큼 중요한 재산은 없습니다. 각종 사내 문화행사, 포상제도 등을 통해 직원의 사기를 높이는 한편 수시로 회사의 중장기 비전을 제시해 직원들과 목표의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인적 자원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주)도원 디테크 윤해균 대표는 “창조하지 못하는 한 발전은 없다”고 말하며 “경영자는 사업을 다각화 시킬 수 있는 아이템을 만들어 내야하며 현 위치에 안주하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윤해균 대표는 자체기술개발 노력뿐만 아니라 디지털 감성경영으로 직원의 역량을 결집하는 경영관리에도 남다른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기업이란 ‘가져가는 것이 아닌 전달하는 것’이란 생각으로 직원들의 복지와 참여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회사윤리강령을 제정 공표하여 전 임직원이 깨끗하고 합리적인 업무수행을 정착시키도록 하는 정도경영을 지향하고 있다.
(주)도원 디테크의 또 다른 강점은 정예화․프로화에 있다. 임직원 대부분이 유명 건설사와 연구소, 그룹사 출신으로 80∼90년대 해외건설을 포함한 국내건설 전성기에 상당한 경험과 실적을 쌓은 베테랑들이다. 또한 건축기사 중 색채기사(colorist)가 있어 공장외관에 색채를 응용, 외관의 별장 같은 예술적 표현으로 발주처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다.
특히 이 팀은 작년 KIST하고 같이 수행한 메탄올 합성 PILOT PLANT의 성공적 턴키수행으로 기술력을 인정받은 바 있다.
또한, (주)도원 디테크 중소규모업체로서 대형건설사의 턴키프로젝트 조직과 동등한 수준으로 운영이 가능한 사내조직 및 외부협력 시스템으로 구축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와 같이 (주)도원 디테크는 중소기업체로서 선진화된 건설운영관리와 활발한 사세확장으로 건설관리기술의 중요성 인식 및 기술개발 동기를 유발하고 일반 발주처의 대형건설업체 선호경향에 변화를 가져오는 파급효과로 우리나라 전체 건설 산업의 선진화와 경쟁력 향상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주)도원 디테크는 국내산업의 신규투자위축에 따른 열악한 공장건설 환경에서도 설립초년도보다 10배 이상 급신장하며 2004년 상반기에만 240억의 매출을 올려 2004년 연말까지 700억 원의 매출을 예상하고 있다.
윤해균 대표는 2005년도 매출은 1,000억 원 이상 무난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주)도원 디테크는 현재 충청권을 중심으로 17개 현장의 공사를 수행 중에 있고 수주를 위해 상담중인 공사가 16건에 이르고 있다.
(주)도원 디테크는 지속적인 신기술개발과 회사신장을 위해 금년 안으로 대전에 기술연구소와 플랜트 기자재 제조공장을 준비하고 있으며, 연관사업 다각화의 일환으로 자체 성장산업의 구축 및 운영을 계획하고 있다.
윤해균 대표는 "중소건설업체로서 단기간에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건설관리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직원들의 기술개발 동기를 끊임없이 유발시킨 점"이라며 "(주)도원 디테크의 초고속 성장은 무조건 대형건설사를 선호하는 일반 발주처들의 인식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대기업에서도 찾기 힘든 하반기 32명의 신규인원채용과 전 직원의 12% 임금인상은 (주)도원 디테크의 견실한 기반을 말해준다. 윤해균 대표의 이러한 인력에 대한 투자는 내년에도 이어질 (주)도원 디테크의 고도성장에 밑거름이 될 것이다.
(주)도원 디테크는 2006년 코스닥 진입과 중국 및 동남아로 진출하는 글로벌 일류기업으로의 성장을 목표로 끊임없이 창조하며 전진 중이다. (주)도원 디테크가 현재의 삼성 엔지니어링 등 대형 엔지니어링사의 뒤를 이어 중형의 플랜트 종합엔지니어링사로 성장해 중국 및 동남아로 진출 하는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나서게 되길 기대한다.
글 / 한국경제신문 정해진 기자 (ek3517@naforum.net)
- 2005년 그 당시 회장의 경영원칙과 임직원에게 당부한 근무수칙과 회사 Slogan 입니다 -
1. 회사 경영, 및 수행 수칙 ( Company Slogan )
1. 우수한 플랜트 건설 인으로 강한 회사를 이룩하여 열정 품은 가슴으로 건설하고 작품에 기술자의 자랑스러운 이름을 묻는다.
2. 수신제가 하고 명품 건축물을 역사에 남기고자 모범 건설인의 자부심으로 완벽한 업무를 수행 한다.
3. 최고의 건설을 위해 악성 및 저가 수주는 멀리하고 제도를 벗어난 관행과 비리에 대해서는 무관용 원칙 고수 한다.
4. 투명 경영으로 소통과 협업을 최우선으로 하며 고객이 믿고 다시 찾는 전통의 건설 회사로 모든 발주처의 꿈과 가치를 실현 시키는 신개념 도원 디테크 ENC
2. CEO 단상(斷想) 어록(語錄)
숱한 경영 회의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나 올바르게 경영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다짐 또 다짐하기위해 되 뇌이던 많은 문구들로 일부라도 여러분이 읽으시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조심스럽게 첨부합니다.
영업 및 수주 활동 시 수칙
- “큰 영업은 항상 게릴라 전략을 세운 후에나 가망이 있다.(천이 십만을 이긴다)
- 열정 Passion - 기업의 가장 중요한 주식이다.
- 영업에서의 끈기는 진돗개 근성이 있어야 한다.
- 축구선수가 볼에 시선을 때면 실점하듯이 영업은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주시하여야 한 다.
CEO 란 모름지기
- 말을 많이 하지 말고 듣는 기술을 익혀라
- 보고 경영에서 실천 경영으로
- 모든 결정은 한 템포 늦추고
- 혼자나 직원과 밥 먹지마라.
- CEO가 불필요하게 때릴 힘을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난관을 피할 수 있는 최소 한의 힘은 갖고 있어야 한다.
- CEO후보 20%는 항상 관리하라(점심, 저녁, 경영회의 통해)
- CEO의 수명은 짧을수록 좋다 100m전력 질주를 하듯 해야 하기 때문에 경영을 오래 할 수 가없다.
- CEO는 만나야 될 사람, 가야할 곳이 정해져 있다.
- CEO는 훌륭한 연극배우여야 한다.
- CEO는 1분 이상 떠들지 못한다.
- 미래CEO는 강력한 Brand 뛰어난 Design 예술적 감성과 창조 성향을 꼭 갖춘 다.(Creative innovation)
- “거친 바다가 훌륭한 항해사를 만든다”
- 함께 공유할 수 있는 VISION
직원에게 늘 그들을 아끼고 있음을 표현하라
완전한 칭찬을 하라
역량을 집중할 때를 파악하라
위험은 함께 나눠라
- 강한 감성 경영
- 기업은 가족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자라는 나무이다.
- 상상하라 그리고 실현시켜라.
경영 철학이란
-못 먹어도 잘 먹는 척, 없어도 있는 척, 취해도 안취한 척, 힘들어도 쉬운 척, 적어도 많은 척, 미워도 이뿐 척, 싫어도 좋은 척하는 노력과 의지가 필요하다
- 10%의 기본과 원칙을 지켜야 90% 행운이 온다.
- 자기 그릇은 자기가 만든다 “그릇 論”
- 튼튼한 돌담은 큰 돌만 쌓은 것이 아니라 작은 돌도 큰 역할을 한다.
- 바람을 보려거든 숲으로 들어가라
- 사랑받은 나무는 제일 먼저 푸르다.
- 이윤을 내지 않는 기업은 사회악으로 적자를 내면 바로 범죄인이 된다.
- 우리 회사의 원칙은 조건 없는 친절이다.(우리 회사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감동과 행복 을 느낄 수 있도록)
- 길을 아는 사람한테 물어보아야 한다.
- 표현하지 않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 화분과 사람은 자기자리가 있다.
- 주어진 조건이 최악이라도 응용하여 긍정적으로 임한다.
- 위기가 곧 기회이다.
- 백년컴퍼니 가는 길로 함께 가자
- 삼국지를 많이 읽고 경영을 접목하는 법을 배워라.
- 매사 크고 작은 일에도 집중과 선택을 생활화한다.
- 인격과 현장을 똑같이 잘 키우는 것도 공산주의 방식이다.
- 논에 벼가 말라가고 있어요. 라고만 말하는 인재는 없다.
- 사장님께 다 보고 하였는데 라고 말하는 인재는 없다.
- 소탐대실(小貪大失)
세상의 이치
내가 높은 자리에 있고 힘이 있을 때 세상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친한듯하지만 바닥에 앉고 보면 세상은 쓰레기 천지이다
골프는 사실 공을 제대로 치기 어려운 운동이다 잘못 맞을 때 그냥 웃고 가고 어쩌다 잘 맞으면 오늘 왜 이렇게 잘 맞지 하며 또 웃어라 세상이치와 같다
모든 분야에 세부 전문가가 있다, 배가 아프면 아무 의사한테 가지 않고 내과로 가는 이치이다.
모든 조직원은 사장처럼 일 한다
기업은 일꾼이 아닌 주인을 간절히 원하고, 종업원이 아닌 사장이 진실로 필요하다
사장의 마인드로 일하기 위해 현재 내 모습을
꿈꾸는 미래의 내 모습과 일치시킨다.
조직은 항상 성과의 연속성을 가진 생명체이다
나는 아래 사람에게 얹혀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묻지마 식 역할을 수행하여 실수 한다든지,
몸값 밥값에 안 맞는 역할수행 (Positioning & Execution)으로 역행하면 안된다
따라서 집중과 선택을 명확히 하여 각자 포지션에서 사장의 마인드로 일함으로서 개인과 조직에 탁월한 성과를 창출하는데 기여함이 요지이며 그중 중요한 Sentence을 다음과 같이 요약 합니다
조직원 각자의 역할 분담은
CEO는 미래를 책임지고 (10년의 비전을 제시)
임원은 내일을 책임지고 (5년 후의 먹거리 창출)
팀장은 오늘을 책임지고 (1년간 전략 전술을 구사)
팀원은 지금을 책임져라
2. 주어진 환경, 주어진 조건 핑계는 그만하고 뚜렷한 성과 목표 책임져라
3. 졸병 근성 청산하고 주인의식 무장하라
자기 스스로 사장처럼 일하는 “셀프CEO” 바로 사내 사업가로 일하라
내가 속한 조직을 내가 먹여 살린다는 사업가적인 마인드로 일하라
도원 디테크의 모든 임직원은 성공한 정치가와 같은 4가지 절대적인 조건을 갖추어야한다.
열정, 소통, 청렴, 균형감각
4. 리더는 숲을 보는 역할에 충실해야하고
구성원들은 나무를 헤아리는 역할에 매진해야 한다
5. 처세술이 아닌 영혼을 전수하라
CEO는 구성원을 진정한 사업 파트너로 생각하고 처세술이 아닌
자신이 벼랑 끝에 서서 간절한 마음으로 사업을 실행하면서 이룬다
숭고한 영혼을 가슴으로 전수해야 한다
( 어른의 말을 잘 듣는 아이는 없다 하지만 어른이하는 대로 따라하지
않는 아이도 없다 )
6. 의견 주장보다 사실적 소통을 하자
소통이 안 되면 방심, 망각, 억측이 난무하여 조직을 깨트리나
진솔하고 명확한 문제 해결을 하여 상생적분위기로 이루어야 함
7. 이윤의 노예가 되지 말고 고객 기여에 대해 고민하라
8. 부품 직원 내보내고 열혈 직원 대우하라
구성원의 구태의연한 충성심, 수족과 같이 부리는 단순 복종에서 벗어나
조직에 기생하지 않고
헌신, 배려 등을 갖춘 수평적 조직원으로 전환
9. 열심히 보다 제대로 하라
스스로 활활 타오르는 자연성 열정으로 자기 가치를 창출하는 자생력
끝으로 모든 구성원이 사장처럼 일하기 위해
자기 존엄성을 갖고 인간으로서 양심을 가지고 주체적인 개인, 자기 완결적 업무 종결자 로서의 역할이 곧 사장의 역할이다. 끝 (2015.11)
2005년 동강에서 도원 임원 단합대회 - 레프팅 출발직전 한컷 ㅡ
세상의 거센 물살을 헤치고 겁나게 - 그리고 신나게 고고---
도원그룹 임원 단합대회 - 항상 첫잔은 원샷--
도곡동 본사앞에서 한결같이 외치는 화이팅 --
2004년 중소기업 혁신협회 (INNOBIZ) 수석 부회장시절 회의후 회식 자리에서 -오늘은 내가 쏩니다 ㅡㅋ
얼수 코리아
윤 해 균
길고 지루한 역사를 뒤로하고
당당히 100년을 딛고 일어선 한국
호기를 부려 맘껏 피워 보시라
서쪽으로 흐르는 인류 문명 시계는
찬란한 과거의 이곳에 멈추어져있다
국가 번영의 시기에 사는
행운을 가진 지금 사람들
눈이 부시는 것만큼
그대들의 활약을 요구하고 있다
일어나 공격하라
여러분의 지혜로운 창조가
세계를 덮어 나가도록
선조의 억울함과 회한서린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도
광개토대왕의 후예같이
지혜로운 개혁자가 되어라
사방으로 번지는
K-POP의 함성처럼
떠나라 바람처럼 질주하라
한가득 열정과 용기를 담고
미래 역사 이야기에서는
우리 모두가 주인공 이어야한다
도원그룹 로고 -창업때부터 직접 여러번 수정하여 사용한 힘찬 돌고래형상의 회사 상징
2012년 동작 현충원 옆 사당우성 아파트에 살때 방문하여 찍은 사진
5-4-2 건설 현장 일기
도원그룹은 플랜트 엔지니어링 즉 산업플랜트 설계 기술 용역업으로 출발하여 건축 설계를 포함하여 공장설계를 시작하였으나 후에 주력사업으로는 종합건설 사업으로 전국적으로 많은 건설현장을 운영하였고 대부분의 매출이 건설로부터 생성되는 구조로 말 그대로 건설회사인 것이다.
따라서 건설사는 현장경영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고 고객으로부터 약속한 공사기간이나 품질을 지키기 위해서는 유능한 임직원의 노력과 도원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현장의 표준 수칙에 의해 철저히 운영되어야하는 복잡한 구조를 가진 살아있는 생물의 사업현장 더구나 항상 위험과 뜻하지 않은 재해에 대비해야 되고 회사의 최전방 전투가 매일 벌어지는 현장이기도하다.
나는 늘 그래왔듯이 건설현장의 최고 중요한 자리는 현장 소장이고 항상 본사 대표이사를 대신해서 모든 것을 책임지는 자리로 공기 준수, 이윤 창출, 품질보장은 물론 그중 제일 중요한 것은 안전사고 없는 무사고 현장으로 마무리해야한다고 수차례 강조하고 지키려 하였고 10여 년 동안 200여개의 현장을 완공하면서 큰 안전사고 없이 끝난 것에 대해 지금도 감사해하며 안도의 마음과 임직원 모두의 노력의 결과이기도하지만 운이 좋았던 것도 부인할 수가 없다.
내가 현장점검 시에 가끔은 불시에 새벽이나 밤늦게도 방문하지만 정기 방문 시에는 회장의 권위 의식이 절대 아니고 현장소장을 위시한 현장 직원이 정문 앞에 도열하여 회장인 나를 만나는 것부터가 현장의 기강을 중시하고 현장의 정신 무장이 곧 안전과도 연결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의 복장문제, 안전띠 안전화 착용 특히 안전모를 쓰지 않고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현장 출입을 철저히 금한 것으로 도원 현장은 유명하다.
또 하나 중시한 것은 현장 자재의 정리정돈과 청결한 환경유지가 안전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외부 인사나 발주처의 현장방문 시 가장 많이 듣는 얘기로는 현장 분위기가 큰 회사 같고 언제보아도 자재보관 등 현장 전체가 깨끗하게 정리 정돈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시간과 경비가 더들어가는 절차이지만 결론적으로 얻어지는 완벽한 준공의 성과는 몇 배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회사의 방침과 나의 철칙을 요약하면 위험관리, 즉 위험절차 준수( Risk Management )를 항상 몸에 베이도록 익히고 생활화 되어 있어야 만이 지킬 수 있는 것으로 최근 90년대부터는 모든 건설현장에서 별도 부서를 배치하여 큰 비중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선진국 형 건설기법중의 하나로 위험관리지침을 따라야한다.
현장에서 위험관리 절차가 생활화되면 사회에 나가서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가 있다
예를 들면 병원에 오는 외상환자의 30%가 집안에서 일어나는 안전사고로 집안 바닥 낙상, 주방화기 및 화상, 욕실 바닥 미끄럼 사고 등을 미리미리 점검하여 위험의 Risk를 최소화하고 음식점이나 주점 노래방 갈 때에도 비상구의 위치확인과 소화기 유무 확인 등을 사전에 파악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하는 것은 24시간 안전의 생활화를 이루는 건설 인이기 때문이다.
건설현장 뿐만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 주위도 살피며 다녀야 되지만 특히 위를 보고 걷는 것은 위험 합니다 사고는 위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추락이나 낙상 바닥에서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이니까요 그리고 건설현장에서 상호인사는 꼭 거수경례입니다 모자를 쓰고 있으니까 그리고 구호는 “안전”입니다 그것도 큰소리로 “안전“
다음은 건설현장의 총책임자인 소장의 역할을 기술한 것으로 모든 현장소장이 갖추어야할 덕목과 수칙을 하달한 지침서로 일반인과 모든 분야의 리더 그리고 사업의 경영자도 함께 알아두면 참고가 될까하여 좀 길지만 적어보았습니다.
한 달에 한번 전체 현장 소장회의를 주관하고 많을 때는 20여개 현장 소장이 모여 현장별로 공정관리, 공기와 기성 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질책과 독려 칭찬 등을 많이 하지만 그중 빠지지 않는 하나가 현장소장의 권위와 기를 세워주고 회장이 믿고 이끌고 나가기위한 방침으로 회식자리에서 진심을 담아 건배사를 한다 “ 현장소장이란 투 스타 즉 별 두개이고 대통령이나 회장 후보라고 역사가 보여주듯이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도 소장에서 대통령이 되었지 않느냐고“ 다함께 환하게 웃고 첫잔은 항상 원 샷이다 원하는 만큼--
현장소장은 대표이사 권한으로 최전방의 지휘자이고 기술력이나 인력관리, 공사 관리, 자재관리 모든 면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 ( Conductor )로서 중요한 자리이고 장엄한 건물과 플랜트 공장의 완벽한 준공을 이루는 대표선수로 늘 존경받고 위대한 위치에 있다고 나 역시 현장소장 출신으로 몸소 느끼고 그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현장소장 월례회의 - 도곡동 도원건설 본사 6층 회의실에서 -2005년 그당시 도원의 현장소장들은 지혜, 카리스마와 용맹성이있고 더구나 잘 생겼다.
각 건설현장 점검차 방문시 현장 진도, 기성, 안전현황 보고장면 - 끝나고 상경할때 소장에게 회식할 봉투를 건넨다
건설회사 현 장 소 장 론
제 1 장 현장소장이란
현장은 발주처의 요구에 적합한 PROJECT를 창조하기 위하여 협력업체와 이에 소속된 구성원을 운용, 공사를 수행하는 건설회사의 단위 사업장으로 현장을 총괄 관리하는 현장소장은 소 사장이며 야전사령관이며 종합관리자이다.
1. 현장소장은 소 사장이다.
현장소장은 사장을 대리하여 현장을 운영하는 최고 책임자이며 회사를 대표하는 최고 경영자이다.
2. 현장소장은 야전사령관이다.
현장소장은 경영자의 권한 일부를 위임받아 경영의 책임을 지는 야전사령관으로서 PROJECT의 내용과 조건이 상이하여 공사별 시공 계획을 구분하여 수립하여야 하고 작업효율을 높여 당초 예상의 결과를 얻어내야 한다.
3. 현장소장은 종합 관리자(Multiple Manager)이다.
현장소장은 회사가 요구하는 적정 이익 확보를 위하여 품질, 공정, 안전 등을 적절히 관리하는 시공 기술능력과 물건, 사람, 돈을 조정, 통제할 수 있는 종합적 경영관리능력을 구비하여야 한다.
제 2 장 현장소장의 임무
현장소장의 임무는 경영 관리자로서 주어진 PROJECT를 발주처의 요구에 맞게 회사의 제반 관리적 기법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완공, 인도하는 일로서 경영 관리적 차원, 현장 관리적 차원, 대외적 차원, 유의 사항, 주요 권한 등으로 분류하여 살펴본다.
1. 경영 관리적 차원
가. 현장은 실질적인 단위 기업으로서의 경영체임으로 현장소장은 경영 지식과 경영 관리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 현장소장은 회사의 직원이고 현장에서는 경영 관리자라는 이중적 입장으로 현장에서의 법적인 사업주가 자신임을 잊어서는 안 되며 경영층의 의도를 충분히 파악하여 업무를 수행하는 관계로 공사 관리, 조직 관리 등 경영 관리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
2. 현장 관리적 차원
가. 공사는 5M(노무, 시공법, 재료, 기계, 자금)의 생산수단을 활용하여 좋게, 싸게, 빠르게 그리고 안전하게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 좋게 (품질) ‥‥‥ 작업 표준을 완비하고, 이것을 지켜 불량품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불량품의 처치와 재발 방지에 힘써야 한다.
◇ 싸게 (원가) ‥‥‥ 시공에 필요한 재료비, 노무비 및 고정비를 분석하여 품질을 확보하면서 경제적인 공사가 되도록 한다.
◇ 빠르게(공정) ‥‥ 기계의 선정, 재료, 노무의 공급 및 현장 조건, 기상 조건 등을 고려하여 합리적인 작업 순서, 일정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여 시간적 낭비를 줄임으로써 공기를 단축하여야 한다.
◇ 안전하게(안전) ‥‥시설물 및 장구류의 효율적 활용, 교육 실시로 안전사고를 사전에 차단하고 구성원을 위험한 상태로부터 보호하도록 한다.
나. 정당한 이익을 확보해야 한다.
현장소장의 최대의 역할은 ‘이익’을 창출하는 일로서 일시적인 이익이 아니라 기술개발이나 낭비가 없는 공사를 통해 품질을 확보하면서 얻은 적정 이익을 뜻한다.
다. 부하를 효율적으로 육성해야 한다.
현장소장은 일상적으로 구성원을 지휘, 감독하고 작업을 효율적으로 진행시키는 일이 매일같이 반복되므로 자칫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경향이 있어 구성원과 함께 일상업무를 진행하는 데에 세심한 주의력과 올바른 판단력이 요구된다.
라. 협력업체를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 협력업체 사장의 사고방식은 어떤가?
◇ 경영 내용은 건조한가?
◇ 작업 솜씨는 어떤가?
◇ 협력업체 반장의 건강 상태(정신적, 육체적)는 어떤가?
◇ 반장의 기능 정도, 버릇(인간적인 버릇, 지병, 기질)은 어떤가?
마. 조직을 활성화해야 한다.
◇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인 현장소장의 경우, 구성원들은 매우 수동적이 되며 이런 현장에서 창의적인 작업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현장소장은 분위기 활성화로 조직의 효율을 높여야 한다.
- 권위주의적 소장 → 직원의 수동화 → 조직 분위기 경직 → 품질 저하.
- 민주주의적 소장 → 직원의 능동화 → 조직 분위기 활성 → 품질 향상
◇ 부서간 이기주의가 팽배하면 타부서에 책임을 전가하려는 경향이 있으므로 현장소장은 명확한 업무 분장, 명령의 계통화, 부서간의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여 부서 간 원활한 협조를 이루어내는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하며, 부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어리석음은 피해야 한다.
◇ 공사는 준공이라는 목표를 향하여 다수의 힘이 집합되어 전해지는 것이므로 그 조직에 COMMUNICATION이 결여되면 무질서하게 되고 활동도 제약을 받게 된다. 예를 들어 공정표를 편성하였어도 관계자 전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경우, 작업 전체의 보조가 맞지 않아 공정의 준수가 어렵게 되므로 현장소장은 상하, 좌우 COMMUNICATION의 교류를 적극적이고 세밀하게 추진해야 한다.
◇ 항상 신상필벌을 명확히 하여 잘잘못을 확실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실수한 것에 대해서는 그 원인을 규명하고 대책을 강구하여 같은 원인에 대한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한다.
바. 기술개발 및 축적에 노력해야 한다.
품질을 확보하면서 이윤을 극대화하려면 재래식 공법 및 관리의 개선으로 낭비를 최소화하고 기술개발을 통한 시공 효율화를 높이는 수밖에 없다.
◇ 현장에서의 기술개발이란,
- 개발되어 있는 신기술의 적용
-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작업 방법의 꾸준한 개선 → 제안 제도, QC, VE 등의 활동
- 최적 시공계획에 의한 낭비의 최소화
- 현장 간 기술정보 교환, 기술 유관부서의 활용
- 재래식 공법의 개선
사. 발주처가 만족하는 공사를 해야 한다.
발주처는 공사기간 내에 준공이 되며 만족한 품질을 기대하고 있다.
◇ 건설업이라는 것은 고객과의 신뢰 관계에 입각하여 만족한 PROJECT를 완성하여 인도하는 일이다. 고객으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자 없는 완벽한 품질의 공사를 수행함으로써 고객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필요하다.
◇ 현장소장은 고객의 요구에 부합되는 PROJECT를 기간 내에 준공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충실한 시공을 위한 현장 관리, 공정 관리를 철저히 하여 예정된 공기를 맞추려는 노력 등 종합적인 조정, 진행, 수습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3. 대외적 차원
현장소장의 대외업무는 크게 대민, 대관, 대갑, 설계자 기술컨설턴트 등 4가지로 구분한다.
가. 대민 관계 ……… 마음을 열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여 신뢰감을 얻도록 한다.
나. 대관 업무 ……… 유기적인 대인관계를 유지하여 친숙해지도록 노력하며 어려운 문제일수록 사전에 상담한다.
다. 대갑 업무 ……… 갑의 의도를 파악하여 고객 지향적 자세로 임한다.
라. 설계자 기술컨설턴트 ……… 협조적 관계를 유지하여 공사를 충실하고 매끄럽게 진행시킨다.
4. 현장소장의 유의 사항
가. 고객의 신뢰를 얻기 위한 유의 사항
◇ 정확하게 약속을 지킨다.
◇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한다.
◇ 일에 대한 보고를 정확히 한다.
◇ 항상 최고가 되겠다는 의욕으로 성심성의를 다한다.
◇ 고객이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객의 마음을 정확히 파악하고 행동한다.
나. 이익 창출을 위한 유의 사항
◇ 공정이 늦어지면 비용이 많이 든다.
◇ 시공계획 및 관리가 적절하여 공기가 단축되면 제경비는 절감한다.
◇ 품질관리가 좋지 않아 같은 하자가 되풀이 되면 원가, 시간의 손실이 크게 발생한다.
◇ 공법이 개선되면 낭비가 최소화되고 돌관공사를 하면 원가는 높아진다.
◇ 실행예산을 바탕으로 협력업체와의 발주가격을 정하되, 기타 지불되는 내역까지도 합리화를 기하도록 한다.
◇ 중대 재해 시는 예산외의 지출, 사회적 이미지 실추 등으로 손실을 입게 된다.
◇ 계약 조건을 실수없이 명확하게 이행한다.
다. 효율적인 공사 관리를 위한 유의사항
◇ 표준화된 작업방법으로 작업의 능률을 기하도록 한다.
◇ 시방서의 순서대로 일을 추진한다.
◇ 시공계획대로 공사를 진행시키고 문제 발생시, 신속히 처리하여 공기와 안전을 지키도록 한다.
◇ 안전관리에 대한 지도 교육을 철저히 하여 재해 방지에 노력한다.
◇ 작업 목표 내용이 명확해야 하고 그에 따른 준비, 수준, 장해대책 등의 실행에 차질이 없도록 한다.
5. 현장소장의 주요 권한
현장소장의 임무와 역할을 철저히 수행하려면 권한이 있어야 한다. 만일, 권한 없이 임무만 주어진다면 현장소장은 단순한 대행자로 머무르게 되므로 다음의 주요 권한을 행사한다.
가. 인사권 : 고과권, 전배치, 현채 직원
→ 구성원을 적재적소에 배치, 활용하여 효율을 극대화 시킨다.
나. 예산권 : 실행예산 편성권, 집행권
→ 현장에서 사용할 예산을 현장소장이 직접 작성하여 확정하고 이에 따른 집행권도 가진다.
다. 외주 권 : 협력업체 선정 권
→ 공사의 특성에 맞는 협력업체 선정 시, 현장소장이 직접 선정에 참여, 운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수고하는 현장 직원과 뜨거운 악수-
역삼동 16층 옥신빌딩 건설현장은 나의 단골 술집자리였다
1년반후 옥신빌딩 완공된 모습
제 3 장 현장소장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최근에 발주되는 공사는 점차 고도화, 복합화 되고 있으며 고객의 요구 조건도 그만큼 다양화, 특수화되고 있다. 더욱이 입찰조건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품질보증, 공기 단축 등의 요구가 높아지고 수주경쟁도 치열해짐에 따라 수주경쟁력 확보를 위한 기술개발, 관리체계의 선진화 등이 건설업계에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처럼 건설 환경이 급격히 변화하는 여건 속에서 회사의 관리목표를 달성하고, 주어진 PROJECT를 무사히 완공시켜야 하는 현장소장의 책임은 상당히 중요하며 현장소장이 갖추어야 할 자질과 능력에는 많은 사항들이 있다.
1. 현장소장이 갖추어야 할 자질
가. 인간미와 도덕성
현장소장은 업무추진 능력 여부를 떠나 훈훈한 정을 느낄 수 있고 인간적인 매력에 이끌려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있을 정도의 인간미가 있어야 한다. 회사 또는 현장 내에서 직급에 따라 역할과 임무가 주어지고 지휘 계통에 의해서 업무가 수행되지만 인격과 인권은 직위에 따라 달리 취급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구성원을 대함에 있어 이러한 인간적 배려에 소홀함이 없어야 하며 조직 생활에서의 예의범절에 모범을 보이고 규칙과 질서를 준수하는 도덕성을 갖추어야 한다. 불의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고칠 줄 알고, 남이 잘못할 때 잘 지도해 줄 수 있으며, 사생활에 부끄러움이 없는 도덕적 성품을 지녀야 할 것이다.
나. 합리적, 긍정적인 사고
현장소장은 일반적 보편타당성과 상식 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상대방의 의견을 수용할 줄 알아야 하고 상대방도 자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며 인간관계와 업무 처리 면에서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항상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다. 솔선수범
현장소장은 현장의 지휘자로서 구성원을 통솔함에 있어 근무 자세, 개인 생활, 자기 계발 등에 솔선수범함으로써 구성원이 자율적으로 따를 수 있도록 항상 성실하고 모범적인 자세를 유지하여야 한다.
라. 강인한 체력
어려운 현장소장의 역할을 수행해 내려면 반드시 강인한 체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며 건강 상태가 좋아야 의욕적으로 업무를 추진할 수 있으므로 철저한 자기 관리로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2. 현장소장에게 요구되는 능력
현장소장이 경영자적 입장에서 조직을 관리 운영하는데 필요한 능력은 업무수행 능력, 개인 능력, 대인관계 유지 능력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가. 총괄 책임자로서의 업무 수행 능력
◇ 시공기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설계도에 의해서 공사가 진행되었다하더라도 PROJECT에 결함이 생기면 시공자가 비난을 받게 되고 책임을 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현장소장은 시공기술 능력이 있어야 한다.
◇ 경영관리 능력이 있어야 한다.
시공은 생산 방식의 성격상 자재의 조달, 노무의 공급, 기술력까지 모두 외주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현장소장은 구매, 외주관리, 대외절충, 원가계산 등 경영관리적인 업무를 현장에서 처리할 수 있어야 원활한 운영을 할 수 있다. 즉, 현장소장은 재료, 노무, 자금 등을 움직여 조정, 통제할 수 있는 경영관리 능력이 있어야 한다.
◇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조직 구성, 공정 배분, 작업 순서 등 공종마다 새로이 계획하고 실행해야 한다. 계획을 실행으로 옮길 때, 조직원은 외주의 혼성부대이므로 명령만으로는 순순히 응하지 않게 되며 전원이 목표를 향해서 움직이려면 강력한 리더십 발휘가 필요하다. 협력업체를 움직이는 방법은 계약금액이 다소 싸더라도 시공 능률을 올릴 수 있는 사전 준비와 낭비가 적은 공법의 적용 등 현장에서 배려를 해주며 작업 목표와 내용을 명확하게 지시하는 등의 실행에 대한 리더십이 있고, 성과에 대한 보상이 명확해야 한다.
◇ 전체의 조화를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
시공은 여러 직종의 힘이 합하여 진행되므로 어딘가에 부족한 점이 있으면 목표달성에 지장이 온다. 그 부족한 점은 능력 부족, 무책임, 상대 직종과의 부조화 등의 요인에 의하여 현장 전체 공정을 지연시키고 각 직종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어 전 구성원의 사기를 저하시키므로 신속히 배제하되, 전체의 조화를 도모하고 연대책임을 높여 이와같은 부족한 점을 사전에 방지해야 한다.
◇ P.D.C.A의 사이클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공정은 착수 전에 신중하게 계획하고 실행하고 점검하여 처리하는 PLAN → DO → CHECK → ACTION 과정을 거쳐, 잘못된 것은 즉시 수정하도록 한다.
◇ 신속하고 소신있는 의사결정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소한 위험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자신과 용기가 필요하며 발생할 수 있는 작은 실수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신속한 판단이 어려울 때는 협조부서나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해결 방법을 강구하는 것도 적절한 대응책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 개인적으로 갖추어야 할 능력
◇ 자기 계발
자기 계발은 현장소장에게만 요구되는 사항이 아니라 구성원 모두에게 해당되는 중요한 항목이다. 전문지식 및 기술능력을 꾸준히 쌓아 역량을 높이는 한편, 문제 발생시 그동안 쌓은 경험과 실력을 바탕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끈기와 인내
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나 난관에 봉착하는 경우도 발생하여 구성원이 힘을 합쳐 해결할 수 있을 때까지 인내가 요구되므로 현장소장은 도중에 주저하지 말고 구체적인 대책을 수립하여 장애를 극복하고 성취감을 맛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 포용력
구성원의 의견을 경청하고 현장 운영에 적극 반영하여 조직의 단결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에 노력하여 구성원들이 스스럼없이 건의하고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 대인관계를 원만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
◇ 원만한 대인관계 형성을 위해서는 구성원의 능력 및 노력 정도를 올바르게 평가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감정이나 주관에 치우치지 않고 나름대로의 객관적인 평가 기준을 수립하여 올바르게 평가될 수 있도록 공정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 PROJECT의 책임자로서 업무를 수행하려면 공사 관리와 조직 관리는 물론, 섭외능력도 갖추어야 한다.
현장소장은 업무 특성상, 교육 수준 및 사회적 위치가 비교적 낮은 계층부터 사회 저명인사나 기술적, 학문적 수준이 높은 계층까지 포괄적으로 접촉하고 대응해야 하므로 각각의 상황에 맞게 탄력적으로 대처해야 하며, 어떤 계층과도 스스럼없이 일을 풀어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끝으로 간추린 건설현장 소장의 개인적 자세
◇ 건설인 으로서의 목표와 달성 수준을 스스로 설정하여 실천한다.
◇ 전문 기술지식 습득 및 경력관리를 통해 전체를 보는 안목을 키운다.
◇ 원만한 대인관계에 의한 조직의 포용력과 흡인력을 갖춘다.
다음은 필자가 재임시절 새해 현장 직원에게 하달 메세지가 있어 공개합니다.
도원건설 본사 및 현장 임직원 여러분
늦게나마 새해 늘 건승하고 행복한 한해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그간 어렵게 쌓아온 실적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성장의 시기가 바로 올해입니다 .
따라서 회장은 중점적이고 당부하고 싶은 몇 가지 아래 사항 지시하니
꼭 달성하여 금년은 회사도 성장하고 모두가 승승장구하는
원년의 해로 만들 것을 다 같이 힘쓰고 이룩합시다.
1. 신년에 채택한 건설 신 조직에 따라
원활한 협력 속에 기강확립 (건설의 기본 )은 물론
소통 대 화합, 적극적 참여와 역할로 최대의 성과를 이룩합시다.
2. 금년에 필히 달성해야 할 것은 그간의 힘든 과정의 결과물인
현장 매출이익 목표 달성 합시다 ( 현장 실행 율 92%이내를 목표 )
* 현장별 사후평가 필히 시행 후 상벌을 수여합니다.
3. 건설 특성상 본부 설립 초기부터 그간 많은 어려움 중에
험담, 뒷 담화, 루머가 있어 업무 집중, 효율에 악영향을 주어
금년부터 고하를 막론하고 SNS 허위유포 및 대화 소재조차도 삼가 합시다
특히 협력업체를 통해 본사로 이야기가 오는 경우가 많은데
절대 업체와 술자리 여타 모임 안 됩니다.
필히 누구와도 업무외 회사 분위기를 저해하는 이야기는 금물임을 첨언합니다.
그간 우리가 쌓은 노고를 금년에 꽃을 피울 기회로
여러분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로 현실화하여 열매를 나눕시다
꼭 좋은 성과의 한해가 될 것을 회장은 확신하고
당연히 그 공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금년 집중하여 현장별 성공과 여러분의 건승 건강바라며 여러분 화이팅!
도원건설 회장 윤 해 균 ( 날짜가 없는데 대략 2003년쯤 임 )
" 안전은 운이 아니라 즉시 실천이다 "
우리의 시간
A Time for us
윤 해 균
어두운 밤바다를
헤쳐 온 거친 고동소리
우리 시간을 위하여
정박을 실행 한다
줄리엣 난간을 오르듯
너울거리는 욕망
들떠 더운 가슴에
마침 내려앉는 눈송이
비틀거리던 그 때부터
찾고 싶었던 지금
또 부산을 떨어야한다
남은 우리 시간을 위하여
충주 GCI -LS 전선 공장- 충주에서 명품건설 작품으로 2004년 건축대상을 받았다
신문 광고 문구카피
2006년 판교 테크노벨리 도원그룹 본사 조감도 - 부지매입후 설계만 마치고 리먼사태로 입주는 못한 한서린 우리의 요람
지금도 분당에 갈일이 있으면 일부로 피해서 간다 ㅡ
5-5 평양 방문기
2007년 여름 남북의 화해무드가 무르익고 경제 협력추진이 활발하게 전개될 때 정부에서 중소기업인의 대북투자사업을 유치하고 사업차 북한에서 초청받아 방북할 기회가 생겼다.
그 당시 중소기업청에서 임명한 한중 중소기업 협회 회장 자격으로 10여명의 기업 사장들과 함께 난생 처음으로 북한 평양에 대한미국 중소기업 대북 투자단의 단장 자격으로 가게 되었다.
까다로운 절차와 교육을 받고 중국 북경에 가서 고려 항공을 타고 평양 순안 비행장에 내려 보니 평소 보와 왔던 조국 산하와 닮아있어 옛 고향에 온 듯 흥분된 기분 감출 수 없었다.
남한 시골 정류장 같은 순안 공항 청사에서 입국심사를 하고 미니버스를 타고 보통강 호텔로 가는 길에서 본 평양의 첫인상은 그려놓은 듯 단정한 건물이 길옆에 즐비한데 넓은 8차선 길에는 차도 없고 대낮인데도 정적이 느껴져 북적이는 서울과는 대조적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공식일정에 들어간 우리들은 그들이 잘 짜놓은 각본에 의해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고 외부 접촉이나 자유행동, 촬영 그리고 전화조차 금지였다.
다음날 평양의 인민회의 당인가 큰 건물에서 투자협의회를 가졌는데 남한의 차관급 되는 고위인사가 참석하여 하는 말투가 꽤 건방졌고 그때부터인가 상투적인 말투로 우리 북한은 핵을 갖고 있으니 걱정 말고 남한에서 오신 기업인 동무여러분은 북측에 많은 투자를 그것도 빨리 해달라는 협조가 아닌 일방적으로 강요당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도원건설이 대북 사업의 일환으로 설립한 아시아 중소기업 주식회사를 통하여 평양시에서 북쪽으로 40KM 떨어진 남포 공업단지에 5000만원을 투자하여 땅 3000평을 50년 임대 계약 하여(공산권 국가에서는 매매계약은 없고 임대계약만 있음 베트남도 동일함) 설계도하고 부지 지질조사도하여 양파 가공공장을 기획하여 투자 사업으로 시도 하였으나 그 다음해 미사일을 쏘는 바람에 국교가 단절되어 무산되었다.
지금도 북한에서 발행한 서류와 계약서를 갖고 있어 내 생애에 빨리 통일이 되면 도원이 투자한 땅을 찾아 나는 필히 그곳에 갈 것이다.
평양에서 남포 가는 길은 12차선의 넓은 길로 말이 고속도로이지 노면이 많이 파여 시속 60KM이상 달리지 못해 2시간 넘게 걸려 남포에 도착 시내를 둘러보았는데 우리나라 60년대 한국의 거리 풍경에다 남루한 행인들의 생소한 모습 그리고 자동차는 보이지 않고 우마차에 가끔 목탄으로 가는 트럭이 지나가고 짐칸에는 하얀 포대에 대한민국과 적십자 마크가 쓰인 쌀자루가 가득 실려 있었다.
저녁에 평양으로 복귀하여 보위부원이 안내하는 으리으리한 식당에 들어서니 손님은 별반 없고 고전 풍악소리 속에 앉아있는 몇몇을 보니 모두가 남한에서 방문한 정부 공무원들과 언론사 기자와 우리 같은 사업가였다.
식사 후 보통강 일급호텔에 오니 발마사지 하는 곳이 있어 단체로 서비스 받은 후 각기 한사람씩 넓은 숙소를 배정받아 들어가니 더블 침대하나에 탁자와 의자 그리고 텔레비전이 전부인 소박한 남한의 여관 풍경으로 그런대로 옛 멋이 있어 좋았는데 텔레비전은 두 개의 고정된 채널만 있고 쓴 커피 하나 없이 생수 한 병만 냉장고 없이 책상위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창밖을 보니 평양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와 외부 풍경이 너무 좋았는데 저녁이 되어 주변이 어두워지자 평양의 야경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불빛이 전무하고 일부가로등과 기념탑 주위만 희미하게 빛을 낼뿐이었다, 전력사정이 너무 안 좋은 탓이다.
북한은 70년 초반까지 남한보다 잘살았지만 러시아연방이 해체되고 원조가 끊기자 아까 보위부원이 얘기한데로 식량부족은 물론이고 의약품, 연료, 생필품 모든 것이 인민공화국 창건 이래 제일 어려운 시기라고 실토하는 것이 실감이 난다.
내가 알기에도 이당시 남한에서 상당한 현금과 물자지원을 하였던 것으로 알고 나도 선뜻 5000만원 투자한 돈이 조선 공산당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이당시 대한민국은 2006년에는 지방선거가 한참이었고 독일 월드컵 열기와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준비로 알차고 바쁜 대한민국 이었다. 특히 이때 주목할 만한 큰 성과는 2006년 수출 3000억 달러 초가달성과 UAE에 원자력 발전소 건설공사 60억불 수주하여 수출과 더불어 조선업, 해외건설 등이 호조를 보여 경제에 활력이 붙을 때였다.
이때 보고 느낀 평양의 실정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열악하고 북한 주민들이 비참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데는 6박7일 방문으로 충분하였고 그래도 희망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통일 이였다.
사상이 틀리고 대한제국 시절부터 고통과 억압 속에 함께 걸어온 남과 북 진정 바랄 것이 있다면 오로지 통일이요, 그 이유는 다른데서 찾을 필요도 없이 우리는 같은 말을 쓰는 같은 민족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지금도 통일을 소원한다.
평양 순안 공항 활주로에서 -
보통문(普通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정 국보 제2호로, 평양시 중구역 보통문동에 위치한다.
보통문은 고구려시대에 처음 세워진 후 조선시대에 와서 고쳐 세워진 성문으로 6세기 중엽 고구려가 평양성을 쌓을 때 평양성 중성의 서문으로 처음 세워졌으며 고려시대에도 서경의 서문으로 유지되었다. 보통문은 보통강변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고려사〉에는 "광덕문"이라 표기하고 있고, 그 밖에 아침해를 다시 본다는 뜻에서 "우양관"이란 별칭도 있었다.
다음은 인터넷에서 찾은 통일에 공감 가는 이야기가 있어 공유합니다.
우리는 왜 통일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답하다
‘왜 통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또한 그는 평화로운 세상, 더불어 사는 세상, 청년들에게 미래의 꿈을 주는 세상이 행복한 세상이라고 말한다.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통일’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풀어가는 30가지 이야기 속에는 이러한 ‘행복한 통일’ 철학이 깔려 있다. 그는 행복한 통일은 ‘유무상통’(有無相通)의 정신에서 출발한다면서 이렇게 강조한다.
“나눔의 철학이 있는 사회는 행복하다. 이는 가진 것이 모자라 도움을 받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가진 것이 넉넉해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행복하다. 나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고 사람들을 기쁘게 만드는 일이다. 통일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통일한다는 것은 남북이 서로 나누는 일이다. 남는 것을 나누고 모자라는 것을 채우는 일이다. 유무상통(有無相通)의 길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무상통은 통일의 정신이다.”
나눔의 정신을 바탕으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연대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통일의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북이 지닌 잠재력을 바탕으로 남도 북도 함께 상생 번영하는 길을 모색해나가는 것이 통일이며, 그런 점에서 통일은 어느 순간 우리 앞에 다가오는 사건이 아니라, 분단에서 통일로 무수한 점을 찍어나가는 과정임을 강조하고 있다. -옮긴 글에서.
연 평 도
윤 해 균
그렇게 살면 안 되지
무엇에 씌어 모질게 굴어야하나
얼마나 힘들게 세뇌 당했으면
동족에게 대포를 겨눠 살상하는
그런 것까지 안하고 살수는 없나
우리나라가 어려웠던 얼마 전
돌 아이 수령이 일으킨 불행한 전쟁으로
우리 조상들이 입은 큰 상처 위에
자식까지 대를 이은 전쟁 놀음
그렇게 하면 안 돼지
하루를 살더라도 그렇게 살지 말고
힘이 있다고, 건드릴 수 있다고
잘 도와주지 않는다고
추구하는 생각이 다르다고
형제를 칼로 툭툭 찌르는 것은
어떠한 사연 핑계로도
말이 되나 불안하고 측은하다
시간과 공간속에 역사는 있다
같이 누리며 사는 세계 이웃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생애에 국가나 개인이 남길
바른 생각과 옳은 판단의 사고로
역사를 일구기도 바쁜 인생에
미치지 않았다면
절대 그렇게 살지 마라
애처로운 북한 높은 형제들아
아 - 평양의 봄은 언제인가
윤 해 균
반디 (북한의 무명시인)
북녘 땅 50년을
말하는 기계로,
멍에 쓴 인간으로 살며
재능이 아니라
의분으로,
잉크에 펜으로가 아니라
피눈물에 뼈로 적은
나의 이 글
사막처럼 메마르고
초원처럼 거칠어도,
병인처럼 초라하고
석기처럼 미숙해도
독자여!
삼가 읽어다오
-반디
작가 반디는 북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소속으로 현재 북한에 거주하고 있다. 그의 필명인 반디는 '반딧불이'를 뜻하는 말이다. 전체주의 체제 하에서 겪는 삶에 대한 일련의 이야기를 <고발>이라는 제목으로 탈북자, 브로커 등 여러 사람을 통해 남한으로 원고를 반출시켰다. 이 책으로 인해 그는 '북한의 솔제니친'이라 불리며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 북한에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이 전부 바보는
아닐 것인데, 그런 불합리한 사회에서 어떻게 견디고 살아가는 걸까 ? 그건 주입식
교육의 효과인가 ? 주체사상의 주입의 효과인가?
하지만, 탈북기자의 글에서 그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교육의 능력도,
북한 주민의 지성의 부족도 아닌 '공포, 그 자체' 때문인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공포와 무자비함과 비상식이 통용되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보편적
현상인 것이다.
남한에 와서 겪었던 많은 에피소드들과 북한에 대한 그리움, 안타까움이 각 장마다
너무 많이 묻어나서 책을 읽는 내내 안타까웠다. 북한 내 최고의 지성이라고 불리 우는
김일성대학 내에서 조차도 발생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상들. 북한의 2인자도 수령의
한 마디에 오지로 끌려간다는 사실 이야기들.
나와 같은 말을 쓰고, 비슷한 모습을 한 같은 땅의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이 책의 어느 한 에피소드만 읽더라도
'북한과 통일' 이라는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저자도 중간에 언급했고, 미국 전쟁영화에 자주 나오는 "Leave no man behind, until
they are home" 이라는 말로 이 글에 대해 리뷰를 마무리 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 민족 모두가 대한민국처럼 자유롭고 행복한 사회, 인권이 보장된 사회에서 살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을 포기하면 안 될 것이다.
[출처]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작성자 다니엘
우리 일행 안내를 총괄하던 대남정보국 북한의 보위부원 ( 남한으로하면 차관급 )
북한 평양시내 한식당에서 여종업들과 남한의 가요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고있다
우리가 원치 않았는데 가게된 김일성 생가에서 말 솜씨 좋은 안내원과 함께
필자옆으로 오랫동안 우정을 나눈 한국경제신문의 이치구국장, 조인의 한재권회장
5-6 CEO 회상
CEO 회상
코스모스가 한창인 2009년 화사한 가을
경매로 넘어간 분당의 정든 시그마 오피스텔에서 떠나는 날 건강관리 공단에 차압된
회사 스타렉스 차량에 회사에 마지막 남아있던 짐을 싣는다.
내가 쓰던 컴퓨터 한대, 5년간 재무제표, 회장실에 걸려있던 액자와 상패들, 사용 인감
도장과 잡동사니와 도원 10년사 편찬 자료 등을 박스에 처넣어 싣는다
10년 전 창업 때와 사못 다른 진풍경이나 부산한 마음은 여전하다.
그전보다 수는 적으나 동료들이 있고 힘은 떨어졌으나 또 다른 기다림 같은 기대로
이부사장이 가져온 막걸리로 회한을 달래고 각오를 다진다
정녕 희망가를 부른다면 그래도 가슴에 열정이 살아있다는 희열이 새로운 시작의
출발이다 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다.
운명처럼 시작된 정확히 11년 전의 창업 빗발치는 적진 속에서 운 좋게 버텨온 도원
끝내 회사 파산으로 끝났지만 그간 행복했고 자랑스럽 읍니다
그대들은 승리자입니다 다만 경영책임자인 나는 마땅히 패전 의 모든 책임을 지고
모든 것을 반성하고 벌을 받고 나로 인해 피해를 본 여러분 마음에 빚을 지고
죄인이 된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IMF 때인 1998년 초 동아에 다니던 퇴출회사 동료 직원들과 맨주먹으로
창업하여 숨 가쁘게 앞만 보고 달려온 10년 임직원 200여명에, 건설 도급순위
전국 193위, 매출 1000억 돌파, 해외지사 설립 등 VISION 2010을 향해 잘 나가는듯하던
회사는 2008년 하반기에 들어선 외부경기 악재로 너무도 당연한 듯 무대책 무방비였던
우리 회사에 영업이 부진한 틈을 타 자금 부족으로 정상적인 경영이 어려워지기 시작 하였습니다.
성장 위주 경영으로 기업리스크 관리 체제가 미흡했던 모든 것이 순식간에 어려워
지면서 작금의 파산 상태에 와 있는 것입니다.
한 기업인이 원칙과 무수한 경고를 무시하고 무리한 중국, 베트남 등 해외사업 및
신규인원 확장으로 바닥에 떨어뜨린 회사를 보며 크게 후회하며 참회를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더 잘 할 수도 많은 기회도 있었는데 모든 것이 빗나가 버린 지금
그래서 많은 협력 업체와 임직원들에게 금전적인 피해를 주고 급기야 반사회적
기업인이 된 것을 운명이나 주변 환경 탓으로 돌리기엔 책임자인 나의 과실이 더
크다는 것을 알기에 무거운 마음으로 이글을 씁니다.
창업 후 10년이란 덪에 걸려 운명적이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모든 꿈을 앗아가고
하루아침에 무너져 무력한 내 가슴에 내려앉고만 회사,
그리고 늘 보아오던 사무실 낮 익은 집기들 아니 대부분의 아는 사람과 아끼던
임직원 까지도 180도로 돌아앉은 모습을 보는 순간 이제 막다른 파탄의 길로
내 몰렸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분명 경영에 무능했고 실패한 기업인은 무엇으로도 해명이 안 되는 죄인이고
또한 벌도 있다면 당연히 받아야 된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을 갖고 투명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저는 나쁜 짓을
하고 싶어도 그럴 겨를과 시간도 없이 내 인생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회사 성장에
모든 걸 걸고 전념하였고 매순간 순간 힘들게 정도 경영한 기억 밖에 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1000억대 매출을 올리는 회사 회장이 왜 감추어 놓은 것이 없겠냐고
합니다.
이 부분 만큼은 내소중한 모든 것을 걸고라도 결코 그런 것은 없었고
도리어 창업 전 갖고 있던 전 재산마저 모두 회사에 내놓아 담보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려워지기 시작한 2008년 추석 전후해서 자금 란에 직원 임금 등이
밀려 내 개인 보험을 해약하고 살고 있던 집 전세 보증금 등 저당 잡힌 부동산
외에 가지고 있던 동산 등 내가 가진 전부인 7억여 원을 회사 회생에 내놓고
어떡하든 회사를 정상적으로 가동하고 또 한편으로는 아끼던 회사의 모든 권한을
회사 인수단에 맡기면서까지 회사 살리기를 원했고 전념 하였습니다.
주변에서는 훗날 재기에 필요한 자산을 타 명의로 해 놓으라는 것도 마다했습니다.
10년 정도 경영을 하며 개인 욕심 없이 지켜왔던 자긍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경영실패는 했으나 도덕과 명예는 끝까지 지키고 싶었고 살아온 길도 그러 했습니다.
이제 담담히 결과에 정확을 얘기하고 과오를 받아드려 늦었지만 정면으로 헤쳐 나가겠습니다.
그리고 남은 생애에 만약 기회와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간의 무지와 잘못을 거울삼고
비싼 값을 치룬 경험과 전철을 바탕으로 하여 힘차게 일어나 두 번 실패하지 않는
그래서 꼭 재기에 성공하는 모범 기업인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간 저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은 기업 및 사회의 모든 분들께 일부라도
속죄하고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속히 주어지길 간절히 빌 뿐입니다.
지금 이후에 어떤 환경이나 시련이 주어지더라도 곧고 바르게 새 탄생 한다는 각오로
거듭나는 참된 기업인 아니 새사람이 되겠습니다.
끝으로 저를 알고 아끼고 같이하던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깊은 사죄를 드리며 진정
진실로 반성하는 바입니다.
기업의 파탄 은 나에게 모든 재산과 친구와 다정한 이웃을 잃게 했으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사라고 알게 되었고 이러한 계기도 감사해 하며 그래도 잃은 것은 가장 작은 것이고 싶은 심정으로 받아들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없다 그야말로 목숨뿐이다 아니다 그 잃은 모든 것보다 더 소중한 열정이 있다. 한둘 남은 친구와 옛 동료, 마지막 까지 같이하는 든든한 가족 그리고 창업 전 쥐고 있던 맨주먹과도 흡사한 이러한 상황들을 나는 소중해한다.
곧 60이 다되어 가는 나이지만 건강한 육체와 맑은 정신 그리고 가득 찬 20대의 열정
나는 할 수 있다. 이제야 말로 과거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진정한 또 한 번의 승리자가
될 것이며 절대 사라지지 않는 올림픽의 불꽃처럼 타오르는 진정한 제2의 인생 기업인으로
시작과 출발을 알려 드립니다 .
2009년 1월 11일
도원건설 주식회사 /도원엔지니어링 주식회사 /인지 건축사 사무소-대표이사 회장 윤 해 균
또 시작이다
윤 해 균
그간 오욕이 빚어낸
도시 불빛을 따라
한숨이 뚝 떨어져
강 속 깊이 내려가는데
가위에 꼼짝없이 굳은 몸
꾸물대는 것은 생각뿐
결말은 이런 걸까
깨어나 각오해라
마지막 내뿜는 몸짓
아직도 끄덕이는 심장
약속도 잘하자
다시 잘 세우고
그러면서 떨어버려라
걱정과 아쉬움
속 깊은 곳에 남아
차가운 성찰과 같이하는
뜨거운 열정을 위하여
다음 시작은 제 3부에서 이어집니다
목차 제3부
6. 다시 시작한 제3의 길
1) 두 번의 건설 위탁 경영과 성과
2) 마지막 창업- 불꽃을 태우다
3) 대학에서의 플랜트 EPC 건설 강의
7. 정시에 찾아온 따사로운 시간
1) 맞춤 운동의 생활화
2) 손주 바보가 된 할아버지
3) 기회는 세 번이다
4) 행복하기보다는 가치 있는 삶
5) 쓰면서 화해하고 치유하니 행복하다
6) 작가의 길
8. 시와 수필 Scrap
1) 왕년 정산 후 다시 꿈꾸는 슈퍼 애벌레 외
글을 마치며 에필로그
첨부 : 윤 해 균 걸어온 길 (연보)
6. 다시 시작한 제3의 길
1) 두 번의 건설 위탁 경영과 성과
2) 마지막 창업- 불꽃을 태우다
3) 대학에서의 플랜트 EPC 건설 강의
7. 정시에 찾아온 따사로운 시간
1) 맞춤 운동의 생활화
2) 손주 바보가 된 할아버지
3) 기회는 세 번이다
4) 행복하기보다는 가치 있는 삶
5) 쓰면서 화해하고 치유하니 행복하다
6) 작가의 길
8. 시와 수필 Scrap
1) 왕년 정산 후 다시 꿈꾸는 슈퍼 애벌레 외